동진(가명)은 얼마 전 20대 초반의 여성인 예주(가명)씨와 잠시 대화를 했다.
가끔씩 지나치며 눈인사를 하던 사이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게됐던 것이다. 동진은 평소 예주씨의 모습에서 지나칠 정도의 쾌활함과 웃음을 느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은 예주씨의 웃음을 통해 그 소녀를 소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겉은 쾌활해보였으나 예주씨의 눈망울은 웃음 뒤에 숨어 차가운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동진은 어렴풋하게 소녀의 이야기가 예측되긴 했으나 듣고 싶지 않은 충동에 몸부림쳤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들어봤자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진 않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독립해서 따로 혼자 살아요" 예주는 여전히 쾌활한 웃음을 머금으며 자신이 부모에게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즐거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단하네요, 그 나이에 부모에게 독립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진정 예주씨는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사시는 듯하네요"라고 동진은 대답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주의 대답에서부터 동진은 그녀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짙은 먹구름을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은 예주씨가 독립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이셨나요?"라고 동지은 예주에게 물었다. 단순하게 상황을 나눠보면 (특별한 경우)부모님의 적극적인 응원과 긍정에 힘입어 독립을 한 경우에는 이 물음에 대해 소위 쿨한 대답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보통 부모와 사이가 원활하지 않은 경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각기 다양한 형태로 부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주씨의 대답에서 '독립'은 긍정성보다는 '부정성'이 내포되어 동진의 가슴을 울렸다. "그냥 집보다는 밖에 나와서 혼자 살고 싶었어요"라고 예주가 대답했다. 대답을 하는 예주의 표정과 어조에선 집이 싫어서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달려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로부터의 도피가 예주에게서 느껴졌던 것이다.
이 때까진 그 어둠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동진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둠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청춘이 독립을 했다면 분명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동진은 한창 꽃을 피울 청춘인 그녀에게 "앞으로 뭐하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특히 신학을 깊게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예주는 말했다. 동진은 순간적으로 '심리학'보다는 '신학'이라는 단어가 예주씨가 더 중요시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신학'을 먼저 말하기 보단 '심리학'이라는 단어로 여러 대중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녀 나름의 방법을 동원한 듯했다.
'뭐지...이 이상한 느낌은... 신학을 공부하는 건 좋은데, 너무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 잠시 동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예주는 '심리학'보다는 '신학'이야기를 동진에게 하기 시작했다. "저는 책을 잘 안 읽는데요, 어느 날 성경을 읽으니 너무 잘 읽혀서 성경을 모두 읽었어요..." 예주는 동진을 신학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이며 청산유수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순간 180도 달라진 예주의 눈망울을 보며 동진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예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주씨 부모님들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이신가요?" 동진이 예주에게 물었다. "아니요. 집에선 저만 믿고 있어요." 예주가 대답했다. "......그럼...종교적인 문제로 부모님들과의 의견차이가 좀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독립해서 혼자 살고 있어요..."
이런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땐, 단순히 가족간에 종교적인 다양성의 차이로 인해 이런 상황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곰곰이 잘 생각하여 그 이면을 바라보게 되면 단순하게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려하는 바로 그것이 중요한 이유로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행복...사랑...가족...
특별히 종교가 없다는 동진의 이야기를 들은 예주는 계속해서 자신이 믿고 있는 믿음을 동진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동진은 예주의 눈 속에 비친 사악한 그 무언가를 자신이 빼내주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동진이 처음 예주가 '삶의 주인으로 산다'라고 생각했던 게 틀렸던 것이다. 예주는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아픔을 어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했고, 그녀 나름 찾았던 존재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갈망이었던 것 같았다.
동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학도 공부하면서 예술, 철학, 인문, 사회, 역사 등에 대해서도 같이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떤가요? 신학만 공부하는 건 20대에 너무 한 곳만 향하는 느낌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도 저에게 동진씨가 했던 이야기를 했어요..." 예주가 대답했다. 예주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한 이야기를 동진에게도 듣는 다는건 이미 예주씨의 귀에는 동진과 그 외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만큼 아픔이 있었고, 그 만큼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입을 다물고 한 참 생각에 잠기던 동진은 예주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한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예주씨가 보아온 부모님들의 뒷모습은 어떠셨어요?" 마치 자신의 아픔을 알아봐달라 애절하게 눈빛을 보냈는데, 알아봐 주어서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예주는 이야기 했다.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언니와 저 엄마가 함께 살고 있고 아버지는 가끔씩 저만 만나요... 언니는 어릴적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자주 봐서 지금은 아버지를 만나길 싫어해요. 저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크게 아버지에 대한 나쁜 감정이 없어서 가끔씩 만나긴 해요. 그런데 과거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아버지가 이야기하지 말라해서 마음이 좋진 않아요..."
애써 웃는 그녀에게 동진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수 없었다. 이미 예주는 자신이 뛰어넘어야할 그 무엇이 무언지 알고 있지만,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무엇에 대한 절실한 믿음만 가지면 자신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 믿음이 동진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예주씨 '진정한'사람을 만나 '사랑'을 해보는 건 어때요?" "별로에요. 저에게 오는 남자들을 향해 이미 철벽수비를 하고 있어요..." 동진은 더욱 무거워지는 가슴을 달래야만 했다.
"제 생각이 틀릴수도 있지만, 제가 예주씨에게 한 마디 해드려도 될까요?" "예, 해주세요"
"아마 계속 힘들거예요. 아마...행복해지기 어려울거예요. 행복해지려면 정말 많은 노력을 해야할 거예요..." 동진은 예주씨가 상황에 직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예주씨가 뛰어넘어야할 그 녀석이 어떤 존재인지 바라보게 해주고 싶었다.
"제가 예주씨 손등을 살짝 만져도 될까요?" 동진은 이야기했다. "예"
동진은 예주씨의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적당한 고통을 느낄 정도로 꼬집자 예주씨가 그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주씨 지금 고통이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동진은 마지막 물음을 예주에게 던지며 언제가 될진 모르는 작별을 고했다.
떠나는 예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굳게 입술은 다문 동진은 예주씨가 '삶의 주인'으로 살길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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