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29

movie_ Coco Before Chanel 코코샤넬




After all, what does the human want to get by buying the luxury consumption?

처음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상당한 흥행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기좋게 예측은 벗어났다. 명품을 소비하고, 명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샤넬(Chanel)이라는 브랜드의 가치에 대한 스토리를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흥행되지 않아 조기종영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 영화를 봤던 곳도 서울역사박물관 인근에 있는 작은극장이었다(그 당시 상영하는 곳이 별로 없었다).

처음, 우리가 명품이라 일컷는 제품들이 소비될 때는 그 명품을 만든 사람의 가치에 대한 동경, 또는 자신도 그런 사람과 같은 삶을 살고자하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영문에서인지 자본주의시스템에서 언제부터인가 그 '가치'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여 제품을 소비하게 압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욕망은 내가 타인과 구별짓기 되어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는 증폭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 각자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보다 더 우월하다는 계층 나누기의 모습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명품들의 디자인을 살펴보면 다른 보편적인 제품들보다 미적가치가 뛰어난 물품들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명품이라는 브랜드만 달고 제품으로 출시된다고 해서 뛰어난 제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명품을 구매하면서 인간이 결국 소비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인지...

스토리의 구성이 조금은 빈약하다. 갑자기  개연성 없는 장면들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채 보여지는 느낌이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이겠지만, 내 경우엔 기승전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넬(Chanel)이라는 여인의 삶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약간 지루한 면도 있었다.


2014-08-21

book 정신분석입문- 프로이트 지음

Vorlesungen Zur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se
by Sigmund Freud (Author)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고는 하지만, 프로이트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 의견들도 있다. 어쩌면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상반된 의견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새로운 생각들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기 전 가장 먼저 소화하고 넘어가야할 책이 바로 이 책<<정신분석입문>>인 것 같다. 프로이트의 많은 저서들을 읽기 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바탕을 튼튼하게 다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영역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이 무의식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일정한 사실(fact)을 증명해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무의식을 어떤 Text라는 도구를 이용해 표현해 내는 게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미 인간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에 대해 깊게 고민했던 프로이트의 저작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준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정신'에 심각한 문제점들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정신과 관련된 문제들은 바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우리의 심신을 갉아 먹기 때문에 대부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에 병의 근본 원인이 될 것들은 아마도 "마음"과 연관된 여러 보이지 않는 부문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그런 미래의 시대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이 책과의 인연은 행운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이 책이 모든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무의식을 설명해 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좋은 실마리들을 던져준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몸이 튼튼하더라도 정신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튼튼했던 몸은 어느 순간 정신이 겪고 있는 고난을 함께 겪을지도 모른다. 결국 몸과 마음이 끊임 없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과거가 눈에 보이는 몸에 주목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할지도...

프로이트가 아기가 자신의 손가락을 빨고, 어머니의 젖을 빠는 행위들이 일종의 성욕(리비도)의 표출이라고 언급한 그의 의견은 왠지 모르게 좀 더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생각들이 서양의 생각이라고 했을 때, 동양의 관점에서 인간의 무의식과 내면을 바라보는 과정도 함께 고찰해볼 필요성이 있다. 아마도 동양에서 인간의 마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불교의 '무의식'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에 이제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과 마음을 건강하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는 것 같다.


2014-08-17

The GREED of the CAPITAL 자본의 탐욕

CAPITAL still seems hungry.

자본의 식욕은 그 한계를 외면한 채 끊임없는 욕망 속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됐다. 최근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장면들이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보내게 만들었다.

가끔씩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그런데 대형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한 뒤 계산을 하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중 마트의 직원으로 보이시는 몇 분의 등에 호소글이 쓰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 달을 일하고도 100만원 받기가 힘들다.~"라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기억이 틀릴 수도 있음).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들로 구성된 노조와 회사 측과의 임금협상 등 여러 노동 조건과 관련해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또한 이미 매스컴에서도 드문드문 보도가 되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호소글에 대한 맥락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자본은 왜 이렇게 까지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를 만들 게 되었을까? 직원들이 행복하면 그것이 바탕을 이루어 장기적인 안목에서 회사에 더 큰 수익을 창출해 주지 않을까? 결국 직원들의 행복한 삶에 대한 가치가 지금 당장 벌어들이는 돈의 가치보다 못하는 소리인가? 직원들은 대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직원과 회사와의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러 생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피어올랐다. 더 마음을 무겁게 했던 건, 이미 대형마트의 계산하는 시스템이 '무인계산대'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무인계산대'에는 소수의 직원 분께서 서 계시며 무인계산대를 이용하시는 고객들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점점 이 '무인계산대'의 개수가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 아주 천천히 시야에 들어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 오프라인의 은행 고객창구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인터넷뱅킹과 ATM기가 증가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였다.

또 다른 이야기는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했다. 어느 골목에 위치한 슈퍼가 최근에 문을 닫았다. 지인과 슈퍼를 지나다가 지인이 넌지시 "혹시 여기에 편의점 들어오는거 아닌가? 그러면 이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 같은데..."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동조를 하면서도 내심 대자본이 운영하는 편의점이 아닌 어느 개인이 운영하는 그 무엇이 들어오길 바랐다. 그런데 지인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대기업의 편의점이 입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작은 몇평 남짓의 슈퍼자리에 대자본의 독주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순식간에 체계적인 준비과정을 거쳐 눈 깜짝할 사이에 동네슈퍼가 사라지고 편의점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거대자본의 탐식은 진행 중인 것 같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거대자본의 횡포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더 놀라운 건 과거의 전쟁은 (눈에 보이는)총과 칼을 이용해 피를 보는 것이었다면,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거대자본의 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본 어느 누군가가 누구에게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물을지를 명확히 알아내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책임들은 어느 한 명에게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분산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냉정히 말해선 비극의 극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비극인지를 인지해야 비극을 딛고 희망을 볼 수 있을 터인데... 여전히 거대자본은 배가 고픈가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보다도 일단 배고픔을 채우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대기업의 편의점들이 점점 늘어나는 측면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편의점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또한 사람들의 소비심리가 이미 미디어가 만든 습관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냥 동네슈퍼의 간판보다는 대기업 편의점의 간판이 무의식중에 자주 봐왔기에 더 선호할 가능성도 높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자본은 욕망하고 있는 듯하다.


2014-08-13

book_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단순히 연도 등을 외우는 것으로 역사에 접근했을  때는 왠지 모르게 지루한 느낌이 든다. 현재 여러 곳에서 이뤄지는 역사교육도 아마 이런 암기 위주의 교육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어쩌면 우리의 교육제도가 어딘지 모르게 아쉬움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찾아 배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장면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찾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왜 역사를 공부해야하나? 라는 물음보다. '인간의 삶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라는 물음이 이 책을 집어 들게 했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의 모습이 뿌연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다는 답답함과 불안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미래에 벌어질 상황들에 적절히 '대응'할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해 이해해야할 필연성과 당위성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해 너무 궁금했고, 그 과정 속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산을 만난 것이다. 즉, 역사는 내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조력자라고 할 수 있겠다.

'지식'과 '지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식이 있어도 지혜를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있으면 지식은 쉽게 얻을 수 있죠"라고 어느 누군가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단순하게 지식을 암기할 수는 있지만, '지혜'는 단순히 암기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일 것이다. 결국 '지혜'는 글로 표현하여 전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지혜'의 중심에는 인간이 서 있지 않을까? 언젠가 문득 든 생각이다.

이 책에서는 아래의 5가지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욕망 (Desire)- 커피와 홍차/ 금과 철/ 브랜드와 도시
모더니즘 (Modernism)
제국주의 (Imperialism)
몬스터 (Monsters)-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 (Religions)-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재인식되는 중세/ 이슬람의 재인식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각 부문을 나누었을 뿐이지 5개의 주제들이 본질적으로 탐구하는 영역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욕망(Desire)'이라는 주제였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에서 '욕망'은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욕망이 '긍정'과 '부정'을 함께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나친 욕망은 파멸을 몰고 올 수도 있었지만, 적당한 욕망은 인간의 삶을 더욱 진보 시켰다. 이 때부터 생각은 더 깊어졌고, 더욱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전까진 흔히 '욕망'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어감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욕망'하는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다. 꼭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큰 물줄기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주연으로 서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알지 못하면 역사의 물줄기의 방향과 힘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닐런지... 인간이라는 본질은 시대를 떠나서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집의 모양, 입는 옷, 먹는 음식들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지 그것들도 결국 본질적으로  '의식주'라는...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들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게 필요할 것이다.

종교(Religions)에 대해 다룬 부분도 상당히 의미있게 읽었다. 인간으로서 완벽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항상 예측을 빗나가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불안해한다. 그 불안을 종교로 대신하여 안정을 추구하는... 결국 종교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전재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함께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종교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하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미국이 종교적이지 않을 것 같지만 종교적이라는 사실...그리고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이 취임식에서 성경 위에 손을 올리고 선서를 하는 장면...' 등은 우리에게 종교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간인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역사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에 대한 열정의 지속성에는 얼마만큼의 호기심이 있으냐의 문제일 것이고, 그 호기심은 타자로 부터 나온 호기심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현재 나 자신의 고민과 걱정부터 출발하면 언젠가는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다지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고민과 걱정에 직면하는 열정만 있다면 언제가 되었든 역사는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파편화된 지식들이 통섭되어 '지혜'로 재탄생하는 희열을 느꼈다. 그 동안에 고민했던 주제들의 갈피가 잡히는 쾌감을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엇인가를 알아서 좋았다기 보다는 인간이라는 나 자신, 그리고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조금은 얻은 것 같아서 가슴이 뛰었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웠던 것은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저자가 쓴 글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느 누군가의 추천으로 책을 읽었다. 추천인에게 감사를 전한다.


2014-08-08

잊혀졌던 군대 후임

먼 훗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존재라는 것에는 두개의 상반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좋은 기억으로 인한 그리움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기억으로 인한 분노일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좋을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연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연.
우연...필연...
만나서 반가워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얼마 전 좋은 의미로 나를 기억하고 있던 분을 만나면서 든 생각.


어느 날 지인들을 만나러 어느 카페에 갔다. 지인 중 한 분이 사시는 동네에 2-3번 정도 방문 한 적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같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도 그 카페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카페 카운터에 계시는 사장님이 슬금슬금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 은연 중에 느껴졌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이 내 쪽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걸어오시더니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저기... 혹시...제가 아는 분 같아서 그러는데...... 혹시 군 생활 어디서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군 생활하면서 크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었지만, 왠지모르게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옆에 있는 지인분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여서 불안감은 극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차분한 척 하며 입을 열었다. "군생활은 00에서 했어요." 내 말을 듣더니 사장님은 자신의 직감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기쁨에서였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00사단 00중대 0소대에서 근무 하시지 않았나요?" 사장님이 약간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때 나로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현상이지? 자주 오지도 않는 동네, 그리고 자주 오지도 않던 카페에서 과거에 내가 만났던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그랬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곳에서 나도 군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사장님의 얼굴을 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사장님과 비슷한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000이라고 모르시겠어요? 000병장님 분대 분대원이었는데..."

사장님에게 미안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네요. 제가 막 전입해 왔을 때 곧 전역을 앞둔 병장이셨으니까요." 사장님이 이해해줘서 그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같은 소대도 아니고, 같은 소대의 그것도 같은 분대의 분대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가 어디있나?'라며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장님 말씀대로 난 그 당시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었고, 사장님은 군대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두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갓 전입한 이등병이었던 것이다.

사장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잘해드렸나요?"

전역을 한지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에서 지우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어느 날 야외로 훈련을 나갔을 때 주특기 교육을 하는 중에 분대원들이 훈련에 임하는 자세가 나태해졌다는 판단에 고함을 지르고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가급적 분대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군대에서 최소한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분대원들이 책임을 지고 잘 해주길 바랐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한 번인가 상당히 크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두려워한 그 기억을 이등병이었던 사장님은 더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장님에게 조심스래 물어봤던 것이다.

"갓 전입한 저에게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잘 해주셨어요."
다행이었다.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당할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다행이네요. 제가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사장님에게 남아있어서..."라고 미소지으며 사장님에게 말했다.
옆에 있던 지인분들도 상당히 놀란 눈으로 사장님과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인 분들과 이야기하는 중이어서 사장님과는 더 길게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대신 가지고 있던 책 한 권을 사장님에게 만난 기념으로 선물해 드렸다. 좋은 기억으로 만난 기념. 그리고 나를 잊지않고 기억해 준 감사함을 담아 책의 속표지에 간단한 인사말을 적었다.

놀랐다. 나를 기억해 줬다는 사실이...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써 기억해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인데, 애써 기억한 뒤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거셨으니... 개인적으로 작은 희망을 느꼈다. 내 자존감을 지키고, 내 본질을 지켜 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때 당시에 나는 고민이 많았고, 내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엇던 상황으로 기억된다. 혼자서 삶에 대한 여행을 하고 있는 와중에 따뜻한 인연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랬으니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생겼던 것이고 그로 인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2014-08-07

book_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박경철 지음






저자의 <<아름다운 동행 1권,2권>>을 과거에 읽으면서 인간의 삶에 대해 상당히 깊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직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불행을 타인을 통해 간접 경험하면서 마음이 갑갑하면서 무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이 더 크게 일깨워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웃에 대해 생각하고 어떤 형식으로라도 그들의 차가운 손을 잡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됐다. 누군가는 삶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는 게 우리들의 삶일지도 모른다. 그런 불운을 누군가는 피해갔고, 누군가는 온 몸으로 맞으며 힘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불운을 피한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바라봐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회에서 이룬 것은 전적으로 나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가 준 기회'가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래서인지 무의식 중에 오지랖을 넓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려움에 처한 분들에게 큰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힘겨워하는 그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 숨이 나오는 건 왜일까... 게다가 마음이 아프다보니 몸이 아플 때가 종종 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아픔이 아니라 나의 심장을 어떻게든 건드려져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아픔들...그러나 어찌 그 분들의 아픔을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아픔을 보는 것과 그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을테니...

이 책에 담겨있는 어느 소중한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우리가 또는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아픔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직면하는 여러 장면들에 여러 미사여구를 덪붙이다보니 그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일상보다 더 돋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인간의 감동적인 삶들에는 눈물을 훔치면서 정작 나의 삶, 그리고 현실에서의 감동적인 장면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는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가 가슴을 울리는 몇개의 문장들을 적어본다.


=======================
<본문 발췌>


~"일상이 단조롭다는 것만큼 지극한 행복의 경지가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큰 걱정거리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는 고민이 생겼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막상 불행이 닥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오히려 다른 그 무엇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 양 오해하고, 그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아집과 질투, 시기와 증오, 그리고 반목을 거듭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남은 나머지 생을 모르기 때문에 웃고 울고 화내며 살아간다. 신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준 가장 큰 축복은 누구도 죽음의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게 아닐까.~

~삶은 가혹하다. 운명은 주인의 삶을 따로 살피지 않는다. 운명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건, 그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했건, 그가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가졌건,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운명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잘살고 못 사는 거야 자기 책임이라지만, 그래도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 돈이 없어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는 없어야 그래도 이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생명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망설임 없이 같이 손을 잡고 떠나기도 한다. 이런 사랑을 요즘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고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은 아닌지.~

~진료실에 있다 보면 가정폭력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100분의 1도 안 되고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되기 쉽다.~

~우리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세상의 드라마는 불륜으로 넘쳐나고 정작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세상.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까?~

~대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조건과 외모를 보지만 동권 씨 커플은 그와는 달리 서로의 마음을 보고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까지 생각하며 애인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동권 씨가 꺼리는 눈치다. 그것은 아마 자신의 경제 사정과 건강이 여의치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요즘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사랑을 말한다. 만난 지 하루 만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말한 지 몇 달이면 결혼을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못 볼 원수라도 되는 양 서로 등을 돌리기도 한다.~

~만약 그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사람이었다면 1년 이상이나 환자로 만나면서도 과연 알아보지 못했을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누군가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백번 천번 공감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와는 다른 아이가 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아이가 보고 본받으며 자라는 것은 바로 부모의 뒷모습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셨다. 그때 내 곁을 지켜준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그때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일가친척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그중에서 두 친구는 모든 사정을 다 알면서도 몇 년간 모은 적금을 깨고, 심지어 자신의 의사면허증을 담보로 빌린 돈을 내게 내밀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개원의가 되었다.~~그렇게 힘든 과정이 끝나갈 즈음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심장 부정맥이 발생한 것이다.~~"심장을 갈아야 한다면 내 심장이라도 줄 테니까, 걱정 마라."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친구였다. 나는 두 친구와 나를 믿어준 5만 명의 환자들 덕분에 그렇게 고비를 넘겼고 또 생환에 성공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태(胎)가 '어머니'의 몸에 맺히기 전부터 이미 인연을 맺는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 또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에서 비롯한 것이 아생(我生)인데, 그렇게 길고도 강고한 인연의 끈을 인간이 스스로 끊어버리고 독존(獨存)을 꿈꾼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면 이런 인연의 관계망은 혈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우연들은 다시 얽히고설켜 내일의 나를 규정하는 필연이 될 것이다.~

~그러나 팔 다리가 없는 몸은 제대로 된 몸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노홍철 같은 개그맨이나, 안동의 고등어 간잽이 같은 사람들은 과거라면 어떤 대접을 받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인정받는 세상이 오고 있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각 분야에서 자기 역할을 해내는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존경받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저 아이들은 다르다. 저 아이들은 아직 진흙이다. 스스로 만들고 싶은 모양을 만들면 된다. 우리 시대처럼 누가 정해주는 대로가 아닌, 자기가 필요한 용도대로 만들면 된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꽃병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대리 충족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꽃병이 되라고 요구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원하는 모양으로 빚어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만들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다시 뭉개고 새로 빚으면 된다.~

=======================


2014-07-28

story_ The Depression of the Student 어느 대학생의 우울

개인적으로 타인의 삶에 가급적 간섭하려하지 않았었다. 상대방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순간부터 나의 에너지들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더 깊게 들어가 상대의 아픈 마음을 손 잡아주려했을 때는 이상하게 몸이 아프다. 상당히 힘들다. 그래서인지 섣부르게 타인의 삶에 끼어들려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많은 도움은 주지 못하지만, 지금 내가 건넨 작은 선의가 상대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설령 지금 상대방이 내 진심어린 도움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언젠가 시간이 지난 뒤 나와의 마주침에서 느꼈던 내 선의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균형Balance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삶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과정에서 남는 여유 시간을 가까운 지인들을 시작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매순간 인간의 삶은 변화하기 때문에 내게 할애된 시간적, 경제적 여유도 시시각각 변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내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 남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건네는 도움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갓 대학생이 된 지인을 만났을 때였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중 내 뇌리를 쉽게 스쳐지나지 않는 말을 지인이 넌지시 이야기 했다. 무언가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빛 그리고 그 눈빛 속에서 흔들리던 눈망울에서는 뭔지 모르게 삶의 애환을 내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자신이 지금 힘들다는 것을 누군가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지인은 내게 말하는 듯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지인이 삶을 마감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은 그 어떤 핑계들을 덮어버리고 내가 그에게 손을 내밀 게 했던 것 같다.

"~가끔씩 커터칼로 손목을 슬슬 긁어봐요...~"

지인에게 가정불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에게 무거운 상처를 주었을까? 아마도 삶의 주인이 되려는 몸부림 속에서 지인은 힘들어 했던 것 같았다. 그의 부모님은 가정불화를 일으키시지는 않았지만, 부모와 자식간에 얽혀있는 긴 인연의 끈을 쉽게 놓아주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고, 또한 그것들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했던 것 같았다. 더욱이 진정한 사랑에 대한 부재도 그의 삶에 더욱 묵직한 어둠을 가지고 왔는지도 모른다.

지인을 만났을 당시 나는 삶에서 자유로운 휴식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 전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도저히 이대로 살다간 안 될 것 같아서 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삶을 주체적고 자율적으로 살아내기 위해 몸 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갓 대학생이된 지인의 이야기가 아프게 심장을 조여왔고, 내가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위한 실천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단언컨데, 그 당시 내 삶을 성찰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지인의 애절한 눈빛의 의미를 쉽게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지인은 겉은 멀쩡했지만, 마음이 상당히 치쳐있었다. 점점 그 상처들이 쌓였다가는 상상할 수도 없을 긍정적이지 못한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지극히 내 관점에서 그는 상당한 위기 상황이었다. 애써 태연한 척 하면서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이야기했다.

"네가 지금 학교에서 수강하는 회계원리가 어렵다고 하니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있는 곳으로와서 나랑 같이 회계원리를 공부하지 않을래? 내가 회계원리 정도는 잘 알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이 말을 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그를 만나러 가는 것도 좋을 수 있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결단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선택지를 내민 것이었다. 본인이 변화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그 변화는 큰 의미를 갖게되고 지속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생각에... 지인은 흔쾌히 그러겠노라며 승낙했다. 그 이후로 약2달간 지인과 만나 회계원리를 공부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말이 회계원리 공부지 회계원리보다는 지인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에 대해 긍정적인 성찰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차츰 지인의 감정은 따뜻하고 밝게 변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내가 회계원리를 가르쳐준 덕분에 학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았고, 그 학기에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난 단지 너에게 큰 숲만 볼 수 있게 해줬을 뿐이야. 결국은 니가 니 삶을 선택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얻은 것이지" 지인이 고맙다며 내게 이야기했을 때 나는 이야기했다.

보람이라고 할까? 뿌듯함이라고 할까?
아마도 '자존감'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타인에게 내가 건넨 선의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자존감을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그 사람이 긍정을 볼 수 있는...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받은 선의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는 삶의 작은 희망들... 개인적으로 난 이 힘을 믿는다. 아무리 작은 선의라도 그 선의가 쌓이고 쌓여서 이 사회에 큰 희망과 긍정을 선물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 지인에게 건넸던 선의는 그 때로 끝나지 않았다. 지인의 어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됐는데, 어머니께서 감탄하시며 내게 고마움을 표현해 주셨다. "네 덕분에 00이가 많이 환해졌어." 지인은 군대에 가서도 삶을 긍정했던 것으로 보였다. 군생활을 열심히 해서 포상휴가도 나왔었고, 가끔 휴가를 나오면 만났을 때 그가 하는 이야기들에서는 삶의 힘이 느껴졌다. 그냥 지인에게 고마웠다. 내 작은 선의를 잘 받아 더 큰 선의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지인에게 선의를 건네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내 삶에서 위기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게 시간이 없다하여도 소중한 삶을 마감하려는 꽃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그에게 햇볕과 시원한 물을 건네야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힘든 상황에서도 그의 손은 잡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 좀 알겠다. 그 때의 판단과 행동이 참 잘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주변의 가까운 지인들을 일단 잘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물론 멀리 떨어진 사람들에게 건네는 선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현재 우리가 매일 같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긍정적 희망을 구축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익숙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자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익숙함이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하는 소중한 것 아닐런지...


2014-07-25

어느 철학자의 변명

일전에 어느 철학자의 강연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는 걸 봤던 적이 있다. '삶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쓴 저자의 책을 소개하면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연사의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강연은 상당히 의미있었고 우리들의 삶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거우면서도 긍정적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오프라인에 참석했던 여러 사람들의 질문들을 보면서 뭔지 모르게 안타까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쉽게도 개인적인 생각에 질문들 중에는 '삶의 본질'을 건드리는 질문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형식에만 얽매인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 대답하는 장면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보통신 기술의 힘을 빌려 SNS망을 이용해서 직접 질문을 했다. 내용을 줄인다고 했지만, 질문의 길이가 예상보다 더 길어져서 난감했다.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개인적으로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진정한 자유에 대해 고민한다면 결국은 우리가 무의식 중에 가정에서 부모에게 받은 영향과 사회가 강압적으로 강요한 것들을 뛰어 넘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 더욱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 받은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연사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고, 혹시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구체적으로 필요한지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질문의 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하신 연사님이 대답을 하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저도 뭐...부모랑 사이가 안 좋아서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전적으로 개인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답변이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진정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은 인간으로 그 힘들이 수렴하는 것은 아닐런지...

Giving My ALL to The LOVE 내 전부를 다 준 것

'그래!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주기위해 노력하는 거야!'

A는 사랑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A가 인간의 삶에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신뢰하고 진정 사랑하는 것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순간들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철학을 공부한 영향 때문에 A는 그런 결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유럽여행 선물을 해드려도 될까요?" A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선물을 하면서도 그녀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A가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가려고 모아 둔 돈 아니었어?"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A에게 대답했다. "당신은 유럽에 친구가 있어서 보러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난 그냥 여행 가려고만 생각하고 모안둔 돈이니 당신이 다녀오는 게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야" A는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에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A에게 느껴진 밋밋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A는 어느 강연에서 '사랑'에 대해 어느 철학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랑은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줄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예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배가 고픈데, 빵 하나가 있을 때 그 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넬 수 있느냐는 것이죠.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빵을 건네는 건 어느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먹을 빵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A는 철학자가 했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고, 현실에서 사랑하는 그녀에게 행동으로 보이고자 노력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과 '노력한다는 것'에서 A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추스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 돈이면 내가 ~를 살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순간 순간 A의 앞 길을 가로 막았다. 굳이 A가 여행 경비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정도의 돈이면 또 다른 자본주의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A는 아직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 끊임 없이 사랑을 방해하는 잠념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A는  때론 힘들어하기도 때론 어느 이윤지 모르게 행복해하며 짧지만 긴긴 고민의 시간을 견뎌내야했다.

A는 자신의 소유물에 어느 정도의 집착을 하고 있었고, A가 사랑하는 그녀는 잠깐의 망설임과 안타까움을 느끼다가 A의 선물을 받았다. 여기서 느껴지는 간극은 무엇일까? 정말 미묘하게 느껴지는 그 간극은 이렇다. A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A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꽤 어린 나이에 직시했다. 그 때부터 A의 고민과 걱정에는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가?'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가 깊게 자리 잡게 된다. A는 이 삶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 까지 삶에 직면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A와 너무나 다르게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여인이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의 눈에 A가 들어왔다는 사실이 꽤나 희한한 일이겠지만, 그만큼 A가 자신에게 처한 삶의 상황을 승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A는 어느 철학자가 말한 '사랑'에 대한 것을 행동에 옮기면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A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의 눈으로 본 유럽의 풍경은 내가 보는 것이 될 것이고, 당신이 느낀 유럽도 내가 느낀 유럽일 거예요. 여행을 다녀온 당신의 눈과 손을 잡으면 마치 나도 유럽에 다녀온 느낌을 받을 테니까요."

그렇게 그녀는 약 2주동안의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길게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무사히 A에게로 돌아왔다. "A를 위해서 그다지 큰 선물을 사오진 못했어......" 그녀가 안타까운 시선을 A에게 보내며 말했다. A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당신이 아무런 사고 없이 건강하게 내 앞에 있다는 게 큰 선물이예요."

내 전부를 다 준다는 것...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통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4-07-19

Are you an idealist? 너 이상주의자냐?

"너 이상주의자냐? (Are you an idealist)"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말이 있다.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너 이상주의자냐?'라는 물음 덕분에 고민은 더욱 깊어졌었고, 너무 많은 고민의 시간으로 인해 수 차례의 위기를 겪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정상이 아닌 것인지, 세상이 정상이 아닌 것인지...여전히 그 때를 생각하면 뭔가 허전한 아쉬움이 휘몰아친다.

어느 날 가깝게 알고 지낸 동기를 만나게 되었다.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만나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에는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동기는 최근에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기가 아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어딘가에 가서 쾌락을 즐긴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하던 때가 늦은 저녁이 되어가는 중이었던지 이 동기는 그 즐거움을 내게도 권했다. 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그 당시 개인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고 그런 위기 상황에서 정신과 몸을 올바르게 해야한다는 삶의 원칙을 나 자신과는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동기에게 물었다. "너에게 그런 권유를 했던 사람은 네가 여자친구가 있는 걸 알고 있어?" 동기가 대답했다. "알고 있지." "그런데 그 사람은 너에게 왜 그런 권유를 한거야?" 그 때의 정황상 이 물음부터는 더 이상 진지하게 물음을 이어나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쉬운 마음에 동기에게 "차라리 여자친구에게 니가 느끼는 본능의 감정들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여자친구와 잘 상의해서 해결하는 건 어때?" 라고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했었다.

'삶을 살다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수가 반복된다면 그 때부터는 실수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 당시에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넘어갔다. 동기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동기는 삶에서 한 번의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다시 동기를 만나게 됐다. 개인적인 생각에 내심 동기가 과거의 실수들을 반성하고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었다.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직업을 얻기도 했으니 좋은 가치관만 정립이 된다면 더욱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아쉽게도 동기는 내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얻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머리가 더 복잡했던 것은 나도 알고 있는 몇몇 선배들이 동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인데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나를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무리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흔한 말로 '사회에서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라면 결국 사회에 긍정적 기여를 하는 게 맞는 것일텐데, 오히려 더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착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동기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나는 너와의 인연을 끊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너에게 이야기를 할거야. 아마 니가 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상하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아끼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너이기에 친구로서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진짜 친구라면 친구가 듣기 싫은 말도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 동기의 눈빛은 떨렸다. 그 떨림은 긴장된 떨림이 아니라 '이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진지한거야?'라는 눈빛이었다.

조용히 동기에게 물었다. "지금 니 여자친구가 너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니?" "모르지, 알면 안돼지."라고 동기는 대답했다. "그러데 넌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야?"라는 물음에 동기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곤 더욱 진지한 어조로 동기에 마지막 발언을 했다. "너는 여자친구에게 신뢰를 저버렸어......" 이 말에 동기의 반응을 보고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동기와의 인연은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는 내 말에 "그럼 너 지금까지 나랑 이야기할 때 니 마음 속으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거야?"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로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동기와 나는 급하게 헤어졌다. 서로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 뒤로 동기와의 연락은 거의 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애써 내가 먼저 동기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와 혼인을 한다는...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동기에 전화가 또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내 마음 속에서 동기에 대한 애정은 멀어진지 오래였다. 그가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다고하여도 더 이상 가까워지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무거웠고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교차했었다.

"길거리에 쓰레기 청소하시는 분들있지? 내가 쓰레기를 버려줘야 그걸 치워서 돈을 버는 사람이 생기는 거지" 더욱이 동기의 이 말을 듣고 사소한 말 속에서 나와 심각히 가치관이 다르다는 자각을 하고 단호히 절교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나 자신에 대한 반성도 하게됐다.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내가 아쉬웠던 것은 아무런 생각없이 주변 사람들도 다 하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가치관 없이 하는 행동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어느 누군가의 그 말이 생각난다.

내가 정상이 아닌 것인지...세상이 정상이 아닌 것인지...여전히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래도 그 고민 덕분에 얻은 것도 있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얻은 문장..."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기회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동기의 생각들이 좀 더 긍정적인 가치관들로 변화되길 간절히 바라고 기대한다. 그 때가 되어서는 또 다시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