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08

잊혀졌던 군대 후임

먼 훗날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존재라는 것에는 두개의 상반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좋은 기억으로 인한 그리움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기억으로 인한 분노일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좋을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연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연.
우연...필연...
만나서 반가워요.
알아봐 줘서 고마워요...

얼마 전 좋은 의미로 나를 기억하고 있던 분을 만나면서 든 생각.


어느 날 지인들을 만나러 어느 카페에 갔다. 지인 중 한 분이 사시는 동네에 2-3번 정도 방문 한 적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같은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도 그 카페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카페 카운터에 계시는 사장님이 슬금슬금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는 것이 은연 중에 느껴졌다. 별일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다지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님이 내 쪽 테이블로 조심스럽게 걸어오시더니 조용히 이야기하셨다. "저기... 혹시...제가 아는 분 같아서 그러는데...... 혹시 군 생활 어디서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군 생활하면서 크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었지만, 왠지모르게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옆에 있는 지인분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여서 불안감은 극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차분한 척 하며 입을 열었다. "군생활은 00에서 했어요." 내 말을 듣더니 사장님은 자신의 직감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고 있다는 기쁨에서였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혹시 00사단 00중대 0소대에서 근무 하시지 않았나요?" 사장님이 약간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갈 때 나로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현상이지? 자주 오지도 않는 동네, 그리고 자주 오지도 않던 카페에서 과거에 내가 만났던 분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

그랬다. 사장님이 말씀하신 곳에서 나도 군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사장님의 얼굴을 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사장님과 비슷한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000이라고 모르시겠어요? 000병장님 분대 분대원이었는데..."

사장님에게 미안했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네요. 제가 막 전입해 왔을 때 곧 전역을 앞둔 병장이셨으니까요." 사장님이 이해해줘서 그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같은 소대도 아니고, 같은 소대의 그것도 같은 분대의 분대원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가 어디있나?'라며 나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장님 말씀대로 난 그 당시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이었고, 사장님은 군대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고 두려움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갓 전입한 이등병이었던 것이다.

사장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잘해드렸나요?"

전역을 한지 꽤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억에서 지우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어느 날 야외로 훈련을 나갔을 때 주특기 교육을 하는 중에 분대원들이 훈련에 임하는 자세가 나태해졌다는 판단에 고함을 지르고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가급적 분대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나 군대에서 최소한으로 해야할 일들에 대해서 분대원들이 책임을 지고 잘 해주길 바랐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한 번인가 상당히 크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두려워한 그 기억을 이등병이었던 사장님은 더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장님에게 조심스래 물어봤던 것이다.

"갓 전입한 저에게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잘 해주셨어요."
다행이었다.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 당할 상황은 피했다는 안도감 때문에...
"다행이네요. 제가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사장님에게 남아있어서..."라고 미소지으며 사장님에게 말했다.
옆에 있던 지인분들도 상당히 놀란 눈으로 사장님과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지인 분들과 이야기하는 중이어서 사장님과는 더 길게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대신 가지고 있던 책 한 권을 사장님에게 만난 기념으로 선물해 드렸다. 좋은 기억으로 만난 기념. 그리고 나를 잊지않고 기억해 준 감사함을 담아 책의 속표지에 간단한 인사말을 적었다.

놀랐다. 나를 기억해 줬다는 사실이...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써 기억해내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인데, 애써 기억한 뒤 내게 조심스레 말을 거셨으니... 개인적으로 작은 희망을 느꼈다. 내 자존감을 지키고, 내 본질을 지켜 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아마도 그 때 당시에 나는 고민이 많았고, 내 본질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엇던 상황으로 기억된다. 혼자서 삶에 대한 여행을 하고 있는 와중에 따뜻한 인연을 만났던 것이었다. 그랬으니 나에게는 감사할 일이 생겼던 것이고 그로 인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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