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2

book_ Comment je vois le monde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Albert Einstein 알버트 아인슈타인 지음





이 책은 아인슈타인이 한 말과 쓴 글들로 구성되어있다. 번역상의 문제여서일까? 읽는 내내 난독증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책장을 넘긴 적이 많았다. 이해되는 페이지에 집중을 하면서 밑줄을 긋긴 했지만,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더 많았다.

책 내용중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book Secret 시크릿- Rhonda Byrne 론다 번 지음






"이 책만 읽는다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고,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과연 이 책 한 권으로 인생을 역전 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에서 '~ 일주일 만에 끝내기', '~ 하루만에 정복하기'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을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물론, '~만에 끝내기'라는 제목의 책이 막바지 시험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요약서로서의 가치가 클 수는 있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상술로써 소위 '대박'의 꿈을 꾸게해 자신들만의 수익을 챙기려는 지금의 세태에 대해서는 기분 좋게 바라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양서와 악서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해 오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이 책 하나로 자신의 행복을 갈구한다면 결과는 부정적이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는 상황에서 우연히 감이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 행운은 상당히 확률적으로 희소하다. 대신 직접 노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을런지...

책을 읽을 때는 잠시동안 마치 무엇이라도 된 줄 알았는데, 책을 읽은 후에는 그 두근거림이 오래가지 않았다. 실제 삶에서 작은 것들을 실천해가면서 노력에 대한 작은 보상들을 받는 과정이 있다면 그 두근거림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지속성... 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에대한 심혈을 기울인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을 구체화한 실제 삶에서의 실천도 필요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평상 시에 하는 생각의 중요성을 다시금 기억나게 해줬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여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그렇다고하여 무턱댄 긍정은 어쩌면 독이 될 수 있음은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다. 현실을 냉정히 직시한 상태에서의 긍정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2014-06-11

book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Sigmund Freud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성욕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느끼는 성욕의 매커니즘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게되면 성욕을 어느 정도는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서점의 땅바닥에 앉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견주다가 <<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을 선택했었다. 단순하게도 분량이 적은 책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성 발달을 통해 본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구조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 편의 논문은 1.성적도착 2.유아성애 3.사춘기의 재구성 으로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이 논문 형식의 글을 그대로 해석해서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더러있었지만, 이해되는 부분에 집중해서 읽어보면 성에 대해 좀 더 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book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옛날, 군생활을 하던 시절에 <<중국 견문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그 당시 군생활을 하며 읽었던 책들은 죽어가는 감정을 살려주는 작은 불빛이었다. 지식에 중독이라도 된 환자처럼 여러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너무 지식에 목말라서 새벽에 모포 속에서 라이트로 책을 비추며 읽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편히 잠을 자도 될 듯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인지 내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그 무엇에 대한 투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중국 견문록>> 이후에도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등을 읽으며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서는 저자가 직접 세계의 빈민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나라의 사정들을 적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주려 죽는 아이들......그리고 전쟁......저자는 이 책에서 W라는 구호단체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고, 그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겨 그 구호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2009년 8월경에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어떤 지인분을 만나 저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지인분께서 저자가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며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았는지에 대한 수치적 사실이 거짓이라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는 사실이 정확한지의 여부가 중요한 사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저자가 자신의 발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더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면 큰 비판을 받아야겠지만...


2014-06-08

story_ Why do honor to parents? 효도(孝道)는 왜 해야하는가?

"효도(孝道)는 왜 해야하는가? Why do honor to parents?"


이 의문에 어느 누구는 '당연한 걸 묻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의문에 공감하며 지금부터 써 내려갈 한 편의 이야기에 집중할 지도 모른다. 결국, 결론은 효도(孝道)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효도(孝道)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수동적으로 따라갔을 수도 있다는 것에 깊은 고민을 하게될 듯하다. 맹목적으로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그 이유를 알고 부모를 섬기는 것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F는 건드리지 말아야할 것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직면했기 때문이다. 바로 '왜? 효도(孝道)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덕목을 F도 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이 의문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F는 서점에 갔다가 <<효경>>이라는 동양고전을 접하게 된다. 잠시 책 내용을 훑어보다가 그 동안 F의 머리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의 고리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왜?"라는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효경>>이라는 책에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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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5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은중경]에서는 "효孝"라는 개념을 "보은報恩"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효와 보은은 어떻게 다른가? 앞서 말했듯이 효의 본질은 아래서부터 위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전술의 동아일보의 논설이 적확이 지적했듯이 유교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보은"은 필연적으로 쌍방적이다. 보(報)가 있기 전에 반드시 은(恩)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恩)이란 위로부터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은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무량(無量)한 은혜이다. 따라서 [부모은중경]의 위대한 측면은 [삼강행실도]가 강요하는 복종의 윤리를 하해(河海)와도 같은 자비의 윤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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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가 소개한 내용을 읽고 상당한 긴장을 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접했다는 점과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토네이도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본디 효(孝)란 아래에서 위로의 무조건적인 공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위에 소개한 내용에서는 "효의 본질"을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 내용을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부모 입장에서는 굳이 알고 싶지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지도 않은 내용일 확률이 높을 듯하다. 지금껏 알고 있는 효(孝)에 대한 덕목만으로도 부모 입장에서 긍정적인 혜택을 누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효(孝)에 대한 그 과정의 구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효(孝)를 행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부분은 자식이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공경하는 효(孝)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하는 의무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효(孝)는 행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서의 효(孝)에서는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에 휩싸여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지금 소개하는 이야기도 어쩌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孝)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자하는데 의의를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효(孝)의 본질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이라고 했는지 다음 소개하는 공자와 맹무백의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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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93-194

맹무백과 공자의 효 담론

우리는 [논어]의 구절들을 아주 상식적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당연히 주어져 있는 평범한 사태로서 읽어버리고 말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첫 마디,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 孟武伯問孝"라는 말은 객관적인 사태의 기술로서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뜬구름 없이 갑자기 효를 묻는가? 효가 무엇이길래 공자에게 갑자기 던지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가? 효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원초적 감정이고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저절로 느끼는 감성의 체계일 것이다. 결코 이성적 질문의 대상으로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라는 대 석학을 만났을 때 갑자기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는 사실은, 효가 이미 사회적 담론으로서, 즉 하나의 에피스팀(episteme)으로서 객관화되고 공론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무엇이었던가? :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일 뿐. 父母唯其病之憂."



"효를 물었다" 했을 때의 효는 분명 당시의 사회적 가치를 집결시킨 하나의 개념이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은 질문의 대상이 된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행하고 있질 않다. 즉 그 개념의 구조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 전혀 없다. 그리고 효라는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 관한 복종이나 의무의 냄새가 전혀 없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을 말했을 뿐이다(불교의 은恩이나 기독교의 카리스마와 상통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적 성찰이나 설명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느낌"일 뿐이다. 여기에 바로 공자의 위대성이 있고 인간을 바라보는 그 원초적 도덕성의 진실성이 있다. 이러한 공자의 느낌에 대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운운할 수는 없다. 라캉의 "미끄러짐"(시니피앙에 대해 시니피에가 즉각적으로 부착되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는 시니피앙의 연속일 뿐이다. 시니피에는 무의식의 담론 속으로 미끄러져 숨어버릴 뿐이다)을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과 좌절과 갈망이 범벅이 된 인간의 갈등구조가 아닌 것이다. [논어]에서 이미 담론화되고 있는 효를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서 형상화하여 그것을 보편적 통치이념으로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 [효경]이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언제 그러한 작업을 감행하였을까?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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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효(孝)는 본질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주었던 헌신과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심각한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내 부모는 나에게 그런 사랑과 헌신으로 나를 돌봐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게 효(孝)를 강요할 순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과연 비판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물음이다. 어쩌면 지금 나이드신 부모 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위와 같은 생각을할까봐 두려워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정말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 상처를 직면해야할 것임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효(孝)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채, 그냥 살고 있는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부모님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시고, 서로를 아껴주는 가정에서 자란 분들은 효(孝)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헌신과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은혜의 보답은 굳이 사회가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시지도 않고, 서로를 아껴주시지도 않고,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격렬한 다툼을 하시고, 심지어 부모라는 권력을 쥐고 자신의 자녀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를 준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과연 사회가 윤리적 덕목으로 외치는 효(孝)에 대해 과연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사회 통념이 '부모에게 잘해야한다'라고 하니 행동으로야 옮기겠지만, 겉으로는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마음에선 항상 딜레마에 빠져있다면 그 효(孝)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여러분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경우 노력을 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엔 상당히 쉽지 않아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더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죠. 그러니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행복하게 자란 사람보다 수 천배, 수 만배의 노력을 해야할 거예요.~"

상당히 의미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행복'하기가 어려웠으면 '행복'에 대한 구호가 여기저기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겠는가? 어쩌면 '행복'이라는 구호는 컴플렉스의 반영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 효(孝)에 대한 긍정성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이에 대해  F는 어느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앞모습이 아닙니다. 아이 앞에서는 온갖 좋은 말들을 하면서 막상 등을 돌렸을 때는 술을 마시고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거나 부부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는 바로 부모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의미 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는 이야기였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상당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신의 부모들을 닮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내가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부모의 모습이 자신에게서 보여지고 있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끊질긴 인연으로 엮여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부정했던 자신의 부모와 육체적으로 독립을 하여 떨어져 있다고하여 어릴적부터 누적되었던 부모의 뒷모습에서 그 자녀가 쉽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부분이 정말 무서운 부분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 측면이든, 부정적 측면이었든지 간에...... 그래서인지 어떤 분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습관들이 6대-7대를 간다는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할 것이고, 어떻게 앞으로 생각하고 행동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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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8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에게 효자, 가정윤리의 연속성

우리가 일상적 체험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자식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한다 한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를 구가하는 발랄한 생명을 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보호하고, 또 그의 불안정한 판단에 대해 달관된 눈으로 가슴 아프게 쳐다보는 아버지-엄마의 인욕과 사랑(愛惜)의 깊은 심정이야말로 자식이 다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자식이 또 다시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러한 심정을 깨닫게 될 때 가정윤리의 연속성이 성립한다. 그 연속성의 도덕성을 우리가 효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복종적 효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효를 설파한 또 하나의 흐름을 우리는 바로 [부모은중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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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뒷모습을 나의 자녀들이 보게될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하는 뒷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배울 것이고, 그 자녀가 낳은 아이들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아이를 낳지 않는 분에게는 크게 해당되는 부분이 없다. 더군다나 혼인을 하지 않으려는 분에게는 해당되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가정을 만들 마음이 없다면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만 다스리면 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만들어 자녀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에서 큰 문제들이 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혼인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한 아이의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울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주변의 이야기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맞춰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선택에서부터 한 개인의 운명적인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그다지 부모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란 분들께서 그러함에도 부모님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내려고 노력해야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뒷모습을 나의 자녀가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더라도 본인을 위해서 효(孝)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본인의 마음을 좀더 긍정적으로 치유하고 또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비록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불행이 대를 이어 내 자식과 손자, 손녀에게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계속 불행을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끊임없는 긍정을 향한 노력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져야 좋을 듯하다.

F가 다음으로 소개한 내용은, 실제의 삶에서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孝)를 행할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이 내용에서도 상당한 자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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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36-137

~효는 평상의 장이 으뜸, 그러나 포상을 위해서는 극화되기 마련

그러나 효가 발현되는 가장 중요한 장(場)은 삶의 평상시이다. 일상적 평온함 속에서 은은히 꾸준하게 발현되는 효야말로 가장 위대한 효인 것이다. 그러나 평상적 효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구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그 포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포상을 통하여 백성들의 가치관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위대한 효는 포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타인에게 모범으로 내걸 수 있는, 그러니까 타인의 주목을 끌만한 드라마가 없다. 따라서 효의 상황이 점점 극화되게 마련이다. 일상이 아닌 이변(異變) - 재해(災害) - 우환(憂患), 생사의 기로와 같은 극적 상황이 설정되고, 그 극적 상황에 대처하는 효자들의 극적 희생이 그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도가 폐하여지니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나니깐 큰 위선이 생겨났고
육친이 불화화하니깐 효도와 자비가 생겨났다.

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가슴에 새겨보고 또 새겨볼 만한 명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효를 포상하면 효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효를 포상의 대상으로 삼고자하면 효는 위선이 되거나 불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러한 철인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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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마음에 울림을 준다.
효(孝)를 포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효(孝)는 사라지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에서 "큰 위기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평상시"에서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효(孝)를 포상의 대상으로하고, 미디어를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선 뭔가 특별한 것을 필요로 하다보니 평상시의 효(孝)가 등한시 되고, 극화된 효(孝)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닐런지...이런 극화된 효(孝)의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본 여러 사람들은 영향을 받게 되고...

작은 것들이 쌓여 큰 것을 이룬다.
작은 효(孝)가 쌓여 큰 효(孝)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효(孝)를 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거창한 효(孝)부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효(孝)를 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 궁극엔 큰 열매가 맺혀지는 건 아닐런지...


book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한비야 지음





삶을 알고 싶으면 배낭여행을 해보세요.

과거에 한비야씨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 강연회에서 했던 말이다

과거에 약600km를 약20일 동안 오로지 도보로 걷는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초반에 짐을 꾸리면서 배낭에 불필요한 것까지 이것저것 집어 넣었다가 하루 만에 필요 없는 짐을 하나라도 더 빼내는데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배낭에서 불필요한 짐을 빼내면서 진정 인간이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심사숙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인생이라는 먼 여행길을 떠나는데, 배낭이 무거우면 오랜 시간동안 먼 거리를 걸어가는 건 꽤나 힘든 일인 듯하다.

우리는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인생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그 짐이 짊어질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들일까? 너무나도 불필요한 짐의 무게 때문에 얼마가지 않아 지쳐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인생을 장거리 마라톤으로 봤을 때 정말 필요한 짐만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직접 10km 마라톤을 뛰면서 내 몸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없애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는데, 42.195km를 뛰면서는 그런 충동이 얼마나 더 심해질까? 이런 생각의 본질이 인간의 삶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아마도 도보여행을 준비하려는데, 마땅히 방법을 잘 몰라서 미루기만 했던 분들에게 정말 유용할 것이다. 맨 뒷장에는 준비물이며 도보여행 시 주의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그다지 소장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소장하는 순간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2의 한비야가 아니라, 여러분만의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어보세요.라고 강연회에서 한비야씨가 말 했던 것처럼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만의 인생 스토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2014-06-01

Think about BitCoin.

What do you think about Future of Bitcoin?


Bitcoin have the positive influence for the global economy.
However, I have something to concern about the Satoshi Nakamoto.

Why have he(she/they) not appear yet?
Recently, I saw the newspaper about guess of Satoshi Nakamoto.

If he(she/they) appear(s) and explain(s) the BitCoin, ecosystem of the BitCoin could be activation.

Latest, America reported that Bitcoin is property(not currency)


story_ Yeild seat to the mother 엄마에게 자리 양보해라

여유가 준 선물인까? 아니면 불필요한 오지랖과 망상일까?
언제부턴가 인간의 삶 속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심지어 사소한 것들 마저도 놓치지 않고 응시하게되는 버릇이 생겼다. 그 중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보게되는 여러 장면들에서 인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중에 한 무리의 가족이 지하철에 탑승하는 걸 보게됐다. 부모님과 자녀 2명으로 기억된다. 때마침 좌석이 한 개 비어있었다. 그걸 본 아이는 재빨리 걸어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아버지로 보이는 분 께서 "엄마에게 자리 양보해라"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 앉아서 갔다.

이와 비슷한 상황인데,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게된 경우도 있었다.
부모님과 자녀1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이 때도 때마침 좌석이 1개가 비어있었다. 이 때 아버지가 자녀에게 "여기 앉아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위에 소개한 두 상황은 얼핏보면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상황을 응시하게 되면 작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작은 차이'가 먼 미래에는 상당히 다른 상황들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해보이는 두 상황은 엄연히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한 번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자녀에게 "엄마에게 양보해라"라고 말했던 가정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자녀들보다 더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아버지가 어머니 대신 자녀에게 자리에 앉게한 가정은 아버지가 어머니보다는 자녀를 더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한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가정을 이룬 부부가 아닐까? 그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해서 아이들이 태어났을 것이고...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공든 탑은 언제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부부의 사랑이 더 우선시 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앞모습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그늘 아래에서 자란 아이는 행복의 가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것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더 행복하게 자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아이는 냉혹하게도 더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 혹여라도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야만 그토록 바라던 행복의 문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한다.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해지는 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여전히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말들이 여전히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행복"이라는 구호는 컴플렉스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앞모습이 아니라......


book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정 지음





예전에 이 책을 읽으며 좋은 부분을 워드로 정리해 두었었다. 그렇게 잊혀지나 싶었는데, 법정 스님이 세상과 작별을 고할 시점에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났고 직접 구입해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은 책에서 받은 느낌은 과거와 사뭇 달랐다. 삶에 직면했기에 얻은 값진 지혜들 덕분에 책의 여러 구절에서 공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는 말이 설득력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위기라고 생각되었던 상황들이 잘 견뎌낸 뒤 시간이 흐르면서 기회로 탈바꿈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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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72-173

뒷모습


늘 가까이 있어도

눈 속의 눈으로 보이는,

눈을 감을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모습이

뒷모습이다.

이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이 뒷모습을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이야말로 실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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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18-119

존재 지향적인 삶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이므로.

물소리에 귀를 모으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깨우쳐 주는
소리 없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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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미안해 -박진영 지음



이 책과의 인연은 군대에서 맺어졌다.
너덜너덜해진 초판본 책이 내무실에 있길래 무심코 읽었었다.

생각과 가치가 불완전한 20대였던 저자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지금의 상황들과 어울릴만한 주제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름 신선하고 개성있는 그의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저자가 섹스에 대해 우리 사회에 던진 이야기들은 상당히 큰 화제를 몰고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섹스에 대한 농담식 담론이 아닌 '사랑이 전제된 섹스'라는 주제로 그가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아무 여자에게나 야하진 않고,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는 야합니다"라는 그의 발언도 중요한 맥락인 것 같다.

그다지 소장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