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16

movie_ A Dangerous Method 데인저러스 메소드





흥미를 위한 영화는 아니다. 중간 중간에 야한 장면도 등장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적인 부분에서의 논쟁에 대한 내용이 전개되는 영화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한 장면도 그다지 큰 설레임을 주진 못하는 것 같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샤비나 슈필라인(Sabina Spielrein, 1885-1942)

이 세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각자가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에 대한 내용들을 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양 뿐만아니라 동양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도 서양의 관점과 견주어가며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성적 욕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갈수록 금기들이 깨지고 있다할지라도 성(sex)이라는 영역에서의 금기가 어느 정도까지 깨어질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만큼 우리에게 성은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아내지 못하는한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그 동안 간과했을 수도 있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의 의지를 동반한 의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관련된 부분에서의 고민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대부분이 당신이 아주 어릴적 기억에 없는 그 환경의 영향을 통해 지금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것들은 어쩌면 '무의식'의 영역에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 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것들의 누적이라면 행운일 것이지만, 긍정적이지 못한 것들의 누적이라면 상당히 굳은 마음을 먹고 그것들을 변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변화 시키고 혁신 시키는 것의 출발점은 이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진행 중이다.


2014-06-15

book 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주역(周易)에 관심은 있는데, '해석상의 어려움'과 '분량의 어마함'이라는 이유로 읽기를 주저하시는 분들께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주석에 한자 음과 훈을 잘 해설해 놓아서 보기에 편하고, 주석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해석이 잘 되어있어서 그냥 한글만 읽어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다.

64가지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 8가지의 경우의 수와 또 다른 8가지의 경우의 수가 만나게 되면 64가지의 경우의 수가 만들어지게 된다(8x8=64). 이 책에서는 이 64가지 경우의 수에 해당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올지에 대해 독자에게 실마리를 던져준다.

삶을 살다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위기를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위기를 딛고 더 높게 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그 위기로 인해 긍정적이지 못한 또 다른 위기를 겪는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상황을 운명에만 맡기는 것은 어쩌면 아쉬움을 남길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위기의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긍정의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런지... 운명일지도 모를 그것이 인간의 진심 어린 최선의 노력과 만나 작은 희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엉망이 되어버리는 처절한 비애감에 빠진 시기였다. 어떻게든 그 위기를 딛고 더 높게 날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고, 책의 어느 한 구절에서 '올바름'과 '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고, 위기일 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정돈해야한다는 생각을 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선 개인 각자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질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내용으로 수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큰 위기의 과정에서 만난 이 책이 많은 실마리들을 던져줬다. 결과적으로 그 위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냈다.

주역(周易)의 방대한 내용을 이 책이 모두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약6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의 내용을 통해 주역이 말하고자하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자를 몰라도 친절하게 한글 해석이 돼어있기 때문에 읽고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2014-06-14

story_ (2)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까? - 부모의 뒷모습1

[......남편 분과의 사이는 어떠신가요?......]


C가 S에게 남편과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은 이 말에는 우리 삶의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S는 C가 뜬금없이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과의 사랑에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이렇다.

" ~흔히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과 관련해서 단순히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아오는 것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그건 본질은 놓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이가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의 지식과 지혜를 함양하는 것도 교육의 목표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품성과 인격,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적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충만한가?에 대한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바탕이 견고하고 튼실해야 더 멀리갈 수 있고, 부수적으로 성적도 좋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C는 S에게 아이의 학교 등수보다 그 아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S에게 이야기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Mental)이라는 영역의 중요성에 대해 C는 매우 중요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C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갈수록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부분들을 C는 건드리기 시작했다. "~S님 주변에도 자녀들을 두신 분들이 계시죠? 그런데 그 중 유독 자녀에게 집착하는 부모들이 있을 거예요. 이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부부간의 사랑이 돈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는 척하는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예요. 부부가 진정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느냐에 대해 말씀드리는 거예요. 누구나 '척'은 할 수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가 부모의 앞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아이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생각해요. 앞모습이 아니라요...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부부가 있는데, 이 부부는 자녀들보다 부부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아이들 몰래 둘이서 맛있는 음식을 시켜먹고 아이들이 집에 오기 전까지 빨리 그 냄새를 없애려고 분주했다고 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연 어떨까?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하나의 결과물을 소개하자면) 이 부부의 자녀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결과가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들 몰래 맛있는 음식을 시켜드셨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는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본질을 놓치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부부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부가 서로를 진정 위해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뭐. 나 몰래 두 분만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게 서운하긴 하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서로를 사랑하시는구나. 두 분이 서로를 아끼시느라 내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니 난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찾아야지.~' 어떤가? 지나친 억지 주장일까?


(계속....)

classic_ THE FOUR SEASONS 사계- Antonio Vivaldi 비발디 (1678~1741)







과거, 학창 시절에 시험을 볼 때마다 시험 도입부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던 선율이 있었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라는 작품 중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은 바로 그 부분만 반복적으로 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문맥의 흐름에서 그 선율을 들었느지에 따라 같은 리듬이어도 다른 감정을 몰고오지 않을까?

언젠가 지인분의 자녀들에게 익숙히 들었을 만한 '사계'의 일정 부분을 들려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요."라며 아이들이 일제히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며 집중했다. 반복적으로 들었던 음에서는 친숙함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이후에 나오는 익숙치 않은 음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린 대부분 (이렇게 익숙한) 여기까지만 듣죠. 그 이후까지도 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지 않을까요?"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아이들의 눈망울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처음으로 비발디 '사계'를 모두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은 여전히 뇌리를 자극한다. 몇번을 반복해 들어도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이 느껴졌었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아 가끔 대중가요에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고전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하다. 인간의 본질적인 그 무엇을 건드리기 때문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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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레코드만 꼽아 보아도 화자노(로마 합주단, 1954년 녹음), 이 무지찌(F.아요/1959년 녹음), 매리너(성 마틴 아카데미, A. 러브데이/1970년 녹음), 라 쁘띠트 방드(S.쿠이켄/1979년 녹음), 그리고 카알 뮌힝거(슈투트가르트 실내 관현악단, 1951녹음)의 연주가 있다.~"

-출처: <<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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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AYO(펠릭스 아요)가 연주한 음반을 구입했었다. 음반을 구입했을 당시에는 비발디 사계에서 '겨울'을 연주한 부분이 좋았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여름'이 더 듣기에 정겹다. 


[참고]
Vivaldi: Four seasons- I MUSICI

(Spring)
http://youtu.be/YRxB7ssENEk

(Summer)
http://youtu.be/9DWqyUsmxVE

(Autumn)
http://youtu.be/iWeLSSIIDds

(Winter)
http://youtu.be/vZ6BJfz1kow


2014-06-13

poetry_ 편지

편지


당신이 나를 생각하며 썼던
한 글자, 한 글자에서 당신을 느낍니다.

내 곁으로 무사히 온 것 만으로도
나는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당신 자체가 내게 큰 선물입니다.
어디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까요?

진흙탕 속 진주를 알아보는 힘을 지닌 당신을...
어디가서 또 만날까요?

당신은 나의 태양입니다.


2014-06-12

book_ Comment je vois le monde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Albert Einstein 알버트 아인슈타인 지음





이 책은 아인슈타인이 한 말과 쓴 글들로 구성되어있다. 번역상의 문제여서일까? 읽는 내내 난독증에 걸린 것처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책장을 넘긴 적이 많았다. 이해되는 페이지에 집중을 하면서 밑줄을 긋긴 했지만,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더 많았다.

책 내용중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book Secret 시크릿- Rhonda Byrne 론다 번 지음






"이 책만 읽는다면 당신도 부자가 될 수 있고, 인생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과연 이 책 한 권으로 인생을 역전 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에서 '~ 일주일 만에 끝내기', '~ 하루만에 정복하기'라는 제목을 가진 책들을 크게 집중하지 않는다. 물론, '~만에 끝내기'라는 제목의 책이 막바지 시험을 앞둔 사람들에게는 요약서로서의 가치가 클 수는 있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상술로써 소위 '대박'의 꿈을 꾸게해 자신들만의 수익을 챙기려는 지금의 세태에 대해서는 기분 좋게 바라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양서와 악서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에 대해 고민해 오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이 책 하나로 자신의 행복을 갈구한다면 결과는 부정적이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는 상황에서 우연히 감이 떨어지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 행운은 상당히 확률적으로 희소하다. 대신 직접 노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아가는 게 낫지 않을런지...

책을 읽을 때는 잠시동안 마치 무엇이라도 된 줄 알았는데, 책을 읽은 후에는 그 두근거림이 오래가지 않았다. 실제 삶에서 작은 것들을 실천해가면서 노력에 대한 작은 보상들을 받는 과정이 있다면 그 두근거림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지속성... 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서는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에대한 심혈을 기울인 고민! 그리고 그 고민을 구체화한 실제 삶에서의 실천도 필요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평상 시에 하는 생각의 중요성을 다시금 기억나게 해줬다. 무심코 내뱉는 말이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여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그렇다고하여 무턱댄 긍정은 어쩌면 독이 될 수 있음은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다. 현실을 냉정히 직시한 상태에서의 긍정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2014-06-11

book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 Sigmund Freud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성욕을 억제하는 것만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느끼는 성욕의 매커니즘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게되면 성욕을 어느 정도는 지혜롭게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서점의 땅바닥에 앉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견주다가 <<성에 관한 세 편의 해석>>을 선택했었다. 단순하게도 분량이 적은 책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성 발달을 통해 본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구조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세 편의 논문은 1.성적도착 2.유아성애 3.사춘기의 재구성 으로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이 논문 형식의 글을 그대로 해석해서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더러있었지만, 이해되는 부분에 집중해서 읽어보면 성에 대해 좀 더 넓은 관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book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옛날, 군생활을 하던 시절에 <<중국 견문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그 당시 군생활을 하며 읽었던 책들은 죽어가는 감정을 살려주는 작은 불빛이었다. 지식에 중독이라도 된 환자처럼 여러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너무 지식에 목말라서 새벽에 모포 속에서 라이트로 책을 비추며 읽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편히 잠을 자도 될 듯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인지 내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그 무엇에 대한 투쟁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를일이다.

<<중국 견문록>> 이후에도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등을 읽으며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서는 저자가 직접 세계의 빈민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나라의 사정들을 적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주려 죽는 아이들......그리고 전쟁......저자는 이 책에서 W라는 구호단체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리라 다짐하고 있었고, 그 생각을 바로 행동에 옮겨 그 구호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2009년 8월경에 그만두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젠가 어떤 지인분을 만나 저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지인분께서 저자가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며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았는지에 대한 수치적 사실이 거짓이라면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구를 몇 바퀴 돌았다'는 사실이 정확한지의 여부가 중요한 사실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저자가 자신의 발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더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거짓이라면 큰 비판을 받아야겠지만...


2014-06-08

story_ Why do honor to parents? 효도(孝道)는 왜 해야하는가?

"효도(孝道)는 왜 해야하는가? Why do honor to parents?"


이 의문에 어느 누구는 '당연한 걸 묻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의문에 공감하며 지금부터 써 내려갈 한 편의 이야기에 집중할 지도 모른다. 결국, 결론은 효도(孝道)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효도(孝道)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수동적으로 따라갔을 수도 있다는 것에 깊은 고민을 하게될 듯하다. 맹목적으로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그 이유를 알고 부모를 섬기는 것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F는 건드리지 말아야할 것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직면했기 때문이다. 바로 '왜? 효도(孝道)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덕목을 F도 행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이 의문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F는 서점에 갔다가 <<효경>>이라는 동양고전을 접하게 된다. 잠시 책 내용을 훑어보다가 그 동안 F의 머리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던 생각의 고리들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왜?"라는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효경>>이라는 책에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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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5

~효의 본질은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은중경]에서는 "효孝"라는 개념을 "보은報恩"이라는 개념으로 바꾼다. 효와 보은은 어떻게 다른가? 앞서 말했듯이 효의 본질은 아래서부터 위로의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

전술의 동아일보의 논설이 적확이 지적했듯이 유교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보은"은 필연적으로 쌍방적이다. 보(報)가 있기 전에 반드시 은(恩)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은(恩)이란 위로부터 아래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은이란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무량(無量)한 은혜이다. 따라서 [부모은중경]의 위대한 측면은 [삼강행실도]가 강요하는 복종의 윤리를 하해(河海)와도 같은 자비의 윤리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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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가 소개한 내용을 읽고 상당한 긴장을 했다. 지금껏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접했다는 점과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이 토네이도처럼 몰려왔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본디 효(孝)란 아래에서 위로의 무조건적인 공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위에 소개한 내용에서는 "효의 본질"을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 내용을 나이를 지긋하게 드신 부모 입장에서는 굳이 알고 싶지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지도 않은 내용일 확률이 높을 듯하다. 지금껏 알고 있는 효(孝)에 대한 덕목만으로도 부모 입장에서 긍정적인 혜택을 누리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 효(孝)에 대한 그 과정의 구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효(孝)를 행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부분은 자식이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공경하는 효(孝)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하는 의무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여지는 효(孝)는 행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에서의 효(孝)에서는 긍정적이지 못한 감정에 휩싸여 힘들어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지금 소개하는 이야기도 어쩌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효(孝)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자하는데 의의를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효(孝)의 본질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향'이라고 했는지 다음 소개하는 공자와 맹무백의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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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93-194

맹무백과 공자의 효 담론

우리는 [논어]의 구절들을 아주 상식적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식 속에 당연히 주어져 있는 평범한 사태로서 읽어버리고 말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 첫 마디,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 孟武伯問孝"라는 말은 객관적인 사태의 기술로서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왜 뜬구름 없이 갑자기 효를 묻는가? 효가 무엇이길래 공자에게 갑자기 던지는 질문의 대상이 되는가? 효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원초적 감정이고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저절로 느끼는 감성의 체계일 것이다. 결코 이성적 질문의 대상으로서 객관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라는 대 석학을 만났을 때 갑자기 맹무백이 효를 물었다는 사실은, 효가 이미 사회적 담론으로서, 즉 하나의 에피스팀(episteme)으로서 객관화되고 공론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무엇이었던가? :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일 뿐. 父母唯其病之憂."



"효를 물었다" 했을 때의 효는 분명 당시의 사회적 가치를 집결시킨 하나의 개념이다. 그런데 공자의 대답은 질문의 대상이 된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행하고 있질 않다. 즉 그 개념의 구조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 전혀 없다. 그리고 효라는 개념에 관하여 우리가 통상적으로 갖는, "아래로부터 위로의 방향"에 관한 복종이나 의무의 냄새가 전혀 없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걱정을 말했을 뿐이다(불교의 은恩이나 기독교의 카리스마와 상통한다). 그리고 그것은 개념적 성찰이나 설명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느낌"일 뿐이다. 여기에 바로 공자의 위대성이 있고 인간을 바라보는 그 원초적 도덕성의 진실성이 있다. 이러한 공자의 느낌에 대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운운할 수는 없다. 라캉의 "미끄러짐"(시니피앙에 대해 시니피에가 즉각적으로 부착되지 않으며 인간의 언어는 시니피앙의 연속일 뿐이다. 시니피에는 무의식의 담론 속으로 미끄러져 숨어버릴 뿐이다)을 운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욕망과 좌절과 갈망이 범벅이 된 인간의 갈등구조가 아닌 것이다. [논어]에서 이미 담론화되고 있는 효를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서 형상화하여 그것을 보편적 통치이념으로서 만들려고 했던 노력의 결과물이 [효경]이라고 한다면, 과연 누가 언제 그러한 작업을 감행하였을까?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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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효(孝)는 본질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주었던 헌신과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심각한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내 부모는 나에게 그런 사랑과 헌신으로 나를 돌봐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에게 효(孝)를 강요할 순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과연 비판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물음이다. 어쩌면 지금 나이드신 부모 세대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위와 같은 생각을할까봐 두려워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정말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 상처를 직면해야할 것임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효(孝)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르채, 그냥 살고 있는 삶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부모님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시고, 서로를 아껴주는 가정에서 자란 분들은 효(孝)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헌신과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은혜의 보답은 굳이 사회가 강요하지 않아도 마음이 저절로 움직여 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 두 분이 서로를 사랑하시지도 않고, 서로를 아껴주시지도 않고,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격렬한 다툼을 하시고, 심지어 부모라는 권력을 쥐고 자신의 자녀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를 준 가정에서 자란 자녀는 과연 사회가 윤리적 덕목으로 외치는 효(孝)에 대해 과연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사회 통념이 '부모에게 잘해야한다'라고 하니 행동으로야 옮기겠지만, 겉으로는 부모를 공경하면서도 마음에선 항상 딜레마에 빠져있다면 그 효(孝)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여러분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경우 노력을 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보기엔 상당히 쉽지 않아요.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더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죠. 그러니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행복하게 자란 사람보다 수 천배, 수 만배의 노력을 해야할 거예요.~"

상당히 의미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행복'하기가 어려웠으면 '행복'에 대한 구호가 여기저기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겠는가? 어쩌면 '행복'이라는 구호는 컴플렉스의 반영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 효(孝)에 대한 긍정성으로 끝나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이에 대해  F는 어느 누군가의 말을 인용했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앞모습이 아닙니다. 아이 앞에서는 온갖 좋은 말들을 하면서 막상 등을 돌렸을 때는 술을 마시고 아이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거나 부부가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아이는 바로 부모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의미 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고개가 갸우뚱하게 되는 이야기였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상당한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다.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자신의 부모들을 닮고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내가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부모의 모습이 자신에게서 보여지고 있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끊질긴 인연으로 엮여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부정했던 자신의 부모와 육체적으로 독립을 하여 떨어져 있다고하여 어릴적부터 누적되었던 부모의 뒷모습에서 그 자녀가 쉽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런 부분이 정말 무서운 부분인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부모를 닮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 측면이든, 부정적 측면이었든지 간에...... 그래서인지 어떤 분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습관들이 6대-7대를 간다는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어야할 것이고, 어떻게 앞으로 생각하고 행동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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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8

~하나님이야말로 인간에게 효자, 가정윤리의 연속성

우리가 일상적 체험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자식이 아무리 부모에게 효도한다 한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미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를 구가하는 발랄한 생명을 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보호하고, 또 그의 불안정한 판단에 대해 달관된 눈으로 가슴 아프게 쳐다보는 아버지-엄마의 인욕과 사랑(愛惜)의 깊은 심정이야말로 자식이 다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자식이 또 다시 부모의 입장이 되어 그러한 심정을 깨닫게 될 때 가정윤리의 연속성이 성립한다. 그 연속성의 도덕성을 우리가 효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복종적 효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효를 설파한 또 하나의 흐름을 우리는 바로 [부모은중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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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뒷모습을 나의 자녀들이 보게될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하는 뒷모습을 자녀들이 보고 배울 것이고, 그 자녀가 낳은 아이들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아이를 낳지 않는 분에게는 크게 해당되는 부분이 없다. 더군다나 혼인을 하지 않으려는 분에게는 해당되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가정을 만들 마음이 없다면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만 다스리면 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정을 만들어 자녀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에서 큰 문제들이 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혼인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한 아이의 부모로서 자녀들을 키울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주변의 이야기에 자신의 소중한 삶을 맞춰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선택에서부터 한 개인의 운명적인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닐까?...

그다지 부모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자란 분들께서 그러함에도 부모님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내려고 노력해야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 뒷모습을 나의 자녀가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더라도 본인을 위해서 효(孝)를 행하는 것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본인의 마음을 좀더 긍정적으로 치유하고 또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면 비록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그 불행이 대를 이어 내 자식과 손자, 손녀에게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계속 불행을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끊임없는 긍정을 향한 노력이 언젠가는 빛을 볼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가져야 좋을 듯하다.

F가 다음으로 소개한 내용은, 실제의 삶에서 부모님에게 어떻게 효(孝)를 행할것인가? 에 대한 것이다. 이 내용에서도 상당한 자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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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136-137

~효는 평상의 장이 으뜸, 그러나 포상을 위해서는 극화되기 마련

그러나 효가 발현되는 가장 중요한 장(場)은 삶의 평상시이다. 일상적 평온함 속에서 은은히 꾸준하게 발현되는 효야말로 가장 위대한 효인 것이다. 그러나 평상적 효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구나 [삼강행실도]류의 효는 그 포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포상을 통하여 백성들의 가치관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위대한 효는 포상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타인에게 모범으로 내걸 수 있는, 그러니까 타인의 주목을 끌만한 드라마가 없다. 따라서 효의 상황이 점점 극화되게 마련이다. 일상이 아닌 이변(異變) - 재해(災害) - 우환(憂患), 생사의 기로와 같은 극적 상황이 설정되고, 그 극적 상황에 대처하는 효자들의 극적 희생이 그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도가 폐하여지니깐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나니깐 큰 위선이 생겨났고
육친이 불화화하니깐 효도와 자비가 생겨났다.

大道廢, 有仁義

慧智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가슴에 새겨보고 또 새겨볼 만한 명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효를 포상하면 효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효를 포상의 대상으로 삼고자하면 효는 위선이 되거나 불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이러한 철인 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출처: <<효경 한글역주>>- 김용옥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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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도 마음에 울림을 준다.
효(孝)를 포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효(孝)는 사라지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상황에서 "큰 위기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평상시"에서 맞이하게 되는 상황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효(孝)를 포상의 대상으로하고, 미디어를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게 하기 위해선 뭔가 특별한 것을 필요로 하다보니 평상시의 효(孝)가 등한시 되고, 극화된 효(孝)가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닐런지...이런 극화된 효(孝)의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본 여러 사람들은 영향을 받게 되고...

작은 것들이 쌓여 큰 것을 이룬다.
작은 효(孝)가 쌓여 큰 효(孝)를 이루는 것은 아닐까?

바로 지금!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효(孝)를 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거창한 효(孝)부터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효(孝)를 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 궁극엔 큰 열매가 맺혀지는 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