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17

시_ 스며드는 것- 안도현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스며드는 것>, 『간절하게 참 철없이』 중에서

===============

어느 철학자가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라는 전제하에 최소한의 폭력을 행사하려는 존재..."라는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육식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아 인간의 생존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이런 걸 따져서 뭐하나 싶겠지만, 우리의 삶을 제대로 직면한 게 아닐까?

어느 동물은 느끼는 고통을 비명으로라도 표현을 하지만, 꽃게는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생을 마감한다. 그런 꽃게를 나는 맛있게 먹고 있고... 이런 상황이라면 식사 전에 감사함을 담은 기도를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생존을 위해 내가 행사한 폭력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식탁 위에 있는 고기와 채소들에게 전달한 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어올려야할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자기애- someone said

자기애와 관련된 내용
어디선가 본 글인데, 다시 봐도 깊게 읽게되는 글이다.

======================

"~아침에 아들녀석이 이기와 이타에 대해 묻길래, 이기가 우선이라 답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고요. 다만 자신의 본능(원초자아)을 나라고 믿느냐, 이성(초자아)을 나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본능을 사랑하면 금수가 되고 이성적 자아를 사랑하면 사람이 되는데, 전자는 마약이나 술, 담배와 방탕함으로 자신을 망치지만, 후자는 자신에게 학습과 성찰의 기회를 선물하며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면 나의 발전을 가로막고 병들게하는 행위를 할리가 없고, 뒤쳐지고 무력한 자신을 그대로 방치할리가 없다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나를 위해 무엇인가 존귀한 선물을 하게된다고요.

그렇게 진짜 나를 사랑하면 나를 있게한 부모, 나에게 기회를 준 사회, 함께하는 국가, 나아가서는 인류애적 사랑의 념이 생기는 것인데, 정작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부터 배운다고...

유가가 살아남은 것은 '수신'에서 출발한 탓이고, 묵가가 사라진 것은 먼저 나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와 타인을 같이 여기라'는 겸애를 내세운 탓인데,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답했습니다.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가끔 생각합니다.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나와 이웃을 동일시하라는 초월성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지, 나를 제대로 사랑하면서 그 마음을 넓혀나가는 현실성이 우선인지...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이에게 이 말을 하면서 스스로 돌아보았더니, 저 역시 어제하루 돼지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더군요. '바람직한 자기애'를 가지는 것도 '맹목적 이타'만큼이나 어려운 일 같습니다. 우리는 이순간 사랑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애'의 가치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완전치 않기 때문에, 빗나간 이성에 복무할 가능성 때문일 겁니다. 빗나간 이성은 소아적 독선과 아집으로 이어지므로 늘 앞선 분들의 언행을 경청하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테죠.~"

=======================


영화_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날 각 부부의 생물학적 아이가 바뀌게 된다. '피는 못 속인다'라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따라 결국 아이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생물학적인 내 아이는 아니지만, 6년동안 같이 살을 맞대며 웃고 울며, 여러 감정적 교감을 형성한 아이를 그냥 데리고 살 것인가?...

결국 이 영화에서는 따져보고 넘어갈 부분이 좀 많았다. 애초에 왜 아이가 바뀌게 되었는가?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가 자신의 가정환경이 좋지 않음을 비관한 나버지 행복해 보이는 가정을 파탄내고자하는 악의적 충동에 의해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 부분에는 내 가정만 행복해서는 뭔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각 가정은 상당히 상반된 환경이다. 한쪽은 전기상회를 하며 조금은 넉넉하지 못하지만 아버지가 아이들과 상당히 잘 놀아주며 작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가정, 다른 한 가정은 능력있고 좋은 회사에 다니며, 돈도 많은 아버지, 하지만 이 아버지는 아이와 살갑게 놀아주기 보다는 아이에게 계획표를 짜주며 어떤 틀에 아이를 맞추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보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릴적 해보지 못했던 즉, 동경하는 것을 아이에게 대신 시킴으로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성공해보이는 이 아버지는 왜 이런 생각과 행동을 하게됐을까? 영화를 보면 그 본질적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우리가 삶에서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는 중요한 본질들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난 불행했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해질 수 있어'

냉정히 이야기하자면...과연 그럴까? 내 관점에서 몇몇 사람들을 지켜봤을 때, 행복한 사람은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고,불행한 사람은 더 행복해지기 정말 쉽지 않아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미디어매체에서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그토록 귀가 아프게 듣고 있는게 아닐까? 아예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는 게 정말 힘들고 긴 여정이 될거라는 현실적인 구호를 외친다면 그 긴 여정에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하진 않을텐데...상당히 안타까움을 느끼는 부분이다.

그래도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길 원한다면, 몇 만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이 하는 노력보다 수 천배, 수 만배, 수 억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이해하고 실천하신다면 이 글을 쓴 보람을 충분히 느낀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는 아무래도 혼인을 늦게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받은 사랑 그 이상을 보여주는 남자가 아니면 혼인을 하지 않을 테니깐. 물론, 어느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남자여야겠지만... 그 기준도 각기 다를 것이다.
하지만...행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는 기대치가 낮아지다보니 남자가 조금만 잘해줘도 혼인을 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남자의 직업과 경제력을 사랑하는 걸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는 남자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알 수 있을 것이다. 냉정히 말해 이런 부분에서부터 각 가정의 삶이 다양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몰입도는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놓치고 있는 삶의 본질적 측면을 보여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영화였다.


movie_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2013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정말 큰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TIME지 표지에 "YOU"라는 글자만 떡하니 써있었던 적이 있었다. 미디어에 보이는 유명인들을 보며 동경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옛날이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여러 시스템으로 충분히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영화에서보면 "지금 여기에 머문다"는 대사가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지인이 평소에 하던 말인데, 더 깊게 내 마음에 새겨지는 기회가 되었다. 월터가 그토록 찾던 숀 오코넬을 히말라야에서 만나는 장면... 눈표범을 촬영하기 위해 기다리는 숀... 결국 눈표범이 등장했으나 숀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가끔 안 찍을 때도 있어. 정말 멋진 순간에, 나를 위해서,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이 순간에 머물 뿐이야"

이 장면이 상당히 좋았다.
셔터를 누르는 그 짧은 시간도 지금 이순간 깨어있는데 방해가 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예전에 산을 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찍다가 본인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사진 찍는데 정신이 팔리다보니 아름다운 풍경을 온전히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몇년전 들었던 어느 작가의 말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인생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1회의 연극이다. 매 순간 긴장하고, 가장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목표는 이뤄진다. 설령 목표를 이루지 못해도 후회없는 인생이 된다."

상상을 해야 현실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자인 것처럼...이상이 있으니 현실을 직시하게 되니깐.












삶의 정수를 보여준 25번째 필름에 새겨진 사진...바로 필름을 현상하던 월터 본인의 모습이었다.


YOU ; Person of the Year- by TIME magazine



===============

DECEMBER 25, 2006/ JANUARY 1, 2007

PERSON OF THE YEAR

YOU.

Yes, you. You control the Information Age.
Welcome to your world.

==============

' I could be PERSON of the year in TIME magazine.'
How many People can think about it?

Opportunity already comes to people.
People who know that will go future and make the innovation.

I will join the new Paradigm.
My this think and action is because of AGONIZE.


book 무소유- 법정 지음





학창 시절 시험문제에서<<무소유>>의 내용들을 잠깐씩 접했던 적이있었다. 하지만 잠시 접한 경험으로는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무소유의 저자가 '법정스님'이라는건 상식으로 알면서도 정작 책에는 어떤 의미들이 숨어있는지를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었던 기억이있다. 우리의 눈과 귀에 익숙한 책들은 많지만 정작 시간을 내서 제대로 읽어본 책은 과연 얼마나 될까?

책 제목이 '무소유'라서 물욕에 대한 성찰을 다루었나 했더니, 물욕 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삶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서술하고 있었다.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책이다. 책의 제목인 '무소유'의 의미를 책에서 알수 있었다. 무조건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필요한 물건은 소유하지 않는 지혜를 갖는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저자가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로써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제러미 러프킨이 <<소유의 종말>>에서 "과거 소유의 시대에서 이젠 접속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던 부분이 법정의 <<무소유>>에서 말하는 "불필요한 물건은 소유하지 않는 지혜"와 맥을 같이 하는 것 같다.  "꼭 필요한 물건 목록을 작성하는 것보다 버려야할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어느 누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있다. 먼 여행길을 나서는 여행객은 최소한의 짐만을 꾸려서 여행길에 나서야한다. 그래야만 더 먼 거리로의 여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서도 적용된다. 무엇을 버려야할지 고민하고 그것들을 버리고 나면, 진정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이 내 앞에 남아있을 것이다.

최근 모 예능프로에서 '최소한의 물품으로 생활하기'라는 주제로 방송이 나오는 걸 보면서 상당히 의미있는 내용의 프로라는 생각을 했다. 경기침체라고는 하지만 이미 우리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 누리는 그 풍요보다 더 큰 풍요를 희망하고 있기에 불행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빠르게 읽어버릴 책은 아니다. 내 손에 가까운 거리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2-3장씩 넘기며 사색에 잠기면 좋을 책이다.


2014-03-16

신자유주의의 자식들- 우석훈 曰

================

~지금 20대에게 우울증 같은 마음의 병을 일으키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자신감이 없고 패기가 없다며 20대들에게 계속 반복해서 '자신감'을 사디즘적으로 주문한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담은 자기계발서들이 20대 마음의 병을 마조히스트적으로 재발시킨다. 지금 20대들이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마음의 병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확대 재생산 되는 것이 아닐까? 신자유주의가 무서운 건 단순히 마음의 병으로 그치지 않고 몸 자체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추어진 몸, 그 몸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만약 당신이 20대라면, 지난 2,3년 동안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나 기부를 한 적이 있는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란다. 아, 군대 갔다 오셨다고? 훌륭하시다.


[출처:'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우석훈 지음]
=================

예전에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내용인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유효한 것 같다.
사회구조의 문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시대에 과거의 패러다임을 억지로 맞추려다보니 과도기의 특징인 혼란함이 증폭되는 것 같다. 특히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들의 본질적 이유에 대해 깊게 고민할 기회를 갖지 못하다보니 각 개인들은 더욱 혼란의 늪으로 빨려들어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20-30대 청년들 몇명을 연단에 세우고 "여러분도 저처럼 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마음이 상당히 무거웠던 적이있다. 그럼 지금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청년들은 나태하고 게을러서 힘겨워하는 것인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미 출발선이 다른 환경에서 시작을하는데 연단에서 강연하는 그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일까? 이럴때 보면 미디어가 참으로 얄밉다. 청년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입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를 냉정히 볼수 있는 눈을 가리고 단순히 열심히만 살라며 채찍과 당근을 들이밀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지금의 청년들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무한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들을 매우 많이 놓치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보니 상생과 협력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수직적구조에 너무나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꼭 그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시대의 사회구조의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수평적네트워크가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에 이미 와있다. 미래는 이미 와 있는데, 대부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상생과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미래에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룬 것은 내 노력도 분명 필요했겠지만, 사회가 내게 준 기회라는 것도 필요했다. 사회가 내게 준 기회를 단순히 본인들의 운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 않을까?...

사회가 내게 준 기회
이게 중요하다.


[주역 한 구절] (39) 水山蹇수산건

================

(39) 水山蹇수산건


~즉, 어려운 때에는 어려운 것을 풀어 줄 수 있는 대인을 찾아보고서 가르침을 받아야죠(利見大人이견대인). 그리고 어렵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바르게 나아가야 그 결과가 좋은 것 입니다.(貞吉정길)~

~어려운 때일수록 자기 처신을 늘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대산 주역강의-김석진 지음]
================

삶에서 위기가 왔을 때, 가장 먼저 본인의 힘으로 최선을 다해 그 위기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뛰어 넘지 못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야할까?'라는 고민을 하게된다. 자신이 겪고 있는 위기를 온전히 이야기해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인생에서 신뢰할 사람이 단1명이라도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것이다."라고 예전 은사님이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만큼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신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설령 믿을만한 사람이 주위에 없더라도 간접적으로 타인의 지혜를 빌릴 수도 있다. 바로 책을 통해서다. 수 많은 책들 중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조금이라도 제시해 줄수 있는 책을 만나는 것이다. 과거 위기를 겪었을 때 <<주역>>이라는 책이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망망대해 속에 갇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주역>>을 읽으면서 삶의 이치에 대해 숙고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 희망들이 쌓여 삶의 큰 희망으로 탄생했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바르게 나아가는 것...
행동에 옮기기 힘들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한다.
그 이유를 <<주역>>에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야 그 결과가 좋은 것입니다." 라고...


book 여자, 전화- 일디코 폰 퀴르티 지음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여자와 전화기에 대한 내용의 소설인가?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게 되면서 내가 예상 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내용임을 알았다.

이 책은 처음 보는 남자와 처음으로 섹스를 한 30대초반의 여성이 섹스 후에는 남자가 전화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대중들의 생각(고정관념)을 고스란히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소설을 자주 읽지 않아서인지 작가가 묘사했던 풍부한 감성적 표현들에 나의 감정을 제대로 이입하지 못했지만, 소설의 시점이 여성(극중:코라 휩시)이다 보니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들의 생각을 훔쳐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여성의 심리(모든 여성에게 해당되진 않지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읽는 내내 지루했지만 마지막 3-4장을 남겨 놓고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지막 3-4장을 읽으면서 그간의 지루함이 각성 됐다고나할까?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에 얼마나 많은 오해의 소지들이 있는지를 저자가 말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개방적이라고 하는 유럽(여기서는 독일)에서 조차 첫 섹스 후에는 남자가 전화할 때까지 기다려야 매력적인 여성이다.라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놀랍기도 했다.

연애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내숭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고정관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내숭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내숭에 치중하다 보면 진실성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진실성에 더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내일 내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니 내가 살아있는 지금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겨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진심을 담아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일은 예측하기 힘들지만,
현재, 지금 이 순간은 내일을 예측하는 것보다는 덜 힘들테니까...


영화_ 바람난 가족





이 영화를 본 기억은 있었지만,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단지 격렬한 정사신이 나온다는 이유로 호기심에 보았기 때문에 영화의 중요한 내용들은 잊고 말았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 봤던 이 영화에서는 처음 생각없이 봤던 것과는 다르게 느끼는 부분들이 많아졌었다.

우리가 말하는 '성욕'이라는 것에 대해 '진리'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을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능'이라는 측면에서 개인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판단에 맡겨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쉽게 무엇이라 말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극중 황정민(변호사 역)으로부터 파생되는 불행들에 의해서 아내...아들...그리고 가족들...이 겪게 되는 여러 긍정적이지 못한 결과들을 보았을 때 더욱 생각이 깊어졌다. 어느 누군가의 말대로 "세상이 미친 건지 내가 미친 건지..."라는 말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내가 죽은 뒤 내 잘못으로 인해서 내 가족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저는 정말 무서워요"라고 말했던 어떤 이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륜
사회적 관습이 불륜을 상당히 나쁜 것으로 정의 내린 것 같다. 하지만 불륜이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사회가 규정한 윤리와 도덕을 어긴다는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자신의 삶을 상당히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산다고 이해될 수도 있다. 다만, 불륜을 저지르면서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 같다. 현재의 배우자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인간은 나약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가정은 지키면서 자신의 쾌락을 즐기는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그건 '진정한 사랑'이 찾아와 불륜을 했다고 말하기 곤란한 상황아닐까? 진정 자신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면 현재의 배우자와 깨끗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사랑과 진정한 사랑을 나누면 되지 않을까? 이걸 하지 못하니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더 큰 문제들을 야기시키는 건 아닐런지...

혼인이 하고 싶으세요?
사랑을 하고 싶으세요?
어느 누군가의 이 물음에 상당히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