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2

Trapshooting 클레이사격







그 옛날 군대에서한 사격은 대부분 내가 원하지 않았던 수동적인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방아쇠를 당긴 클레이 사격은 그야말로 놀이Play였다. 같은 사격이었지만 상당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자의반타의반 클레이사격을 했는데,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었다. 미디어에서 가끔씩 클레이사격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직접 하고나서 든 생각은... 별로였다.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되겠지만, 본인의 경우 흥미를 느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이런 경험 덕분에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나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프로야구 시범경기(2014년)





정규 시즌이 시작된 건 아니지만, 선수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끔 지인들과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매번 받는 질문이 있다. "어느 팀 응원하세요?"...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조금은 난감하다 특정 팀을 응원하기 보단 그냥 시간이 허락되는 범위에서 야구경기를 시청하거나 경기장에 와서 경기를 관람하기 때문이다.

야구장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화면을 통해 경기를 시청할 때와 직접 경기장에 왔을 때의 다른 느낌이다. 미디어에서는 화려하게 보이던 모습들이 직접 내 눈을 통해 봤을 때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미디어가 현실을 아름답게 각색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나쁘게 말한다면 미디어가 현실을 왜곡하여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렌즈가 보여주는 세상...그리고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보는 세상...내 관점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성만 놓고 봐도 그렇다. 화면에는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여인을 보았을 때 지나치게 몸이 말라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내 경우에 전혀 건강해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미디어의 틀에 짜맞춰지는 수동적 존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면서 미디어의 렌즈가 보여주는 세상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만큼 '미디어'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파울볼을 잡아보려고 글러브를 끼고서 계속 경기를 관람했다. 하지만 이날은 행운의 여신이 내 옆을 살짝 비껴지나갔다. 때가 되면 언젠가는 글러브 속으로 행운이 성큼 들어오리라 기대해본다.

참고로 시범경기는 전석이 무료(Free)다. 그러니 조금만 일찍 경기장에 도착하게 되면 선수들과 가까운 테이블석에서 편하게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주의사항:
이날도 조금은 위험한 장면을 목격했다. 1루측 관중석에서 어느 분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파울볼이 그물망 폴대를 맞고 그 사람 바로 옆좌석에 떨어졌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는 공에 집중하여 혹시라도 파울볼이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는지 주의해야한다. 예전에 어느 여성분이 잠깐 딴곳을 보다가 파울볼에 얼굴을 맞아 피흘리는 장면을 본적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여자친구와 같이 야구장에 온다면 여자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글러브는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파울볼에 맞을 확률이 그리 크진 않겠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야한다.


[주역 한 구절] (47) 澤水困 택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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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澤水困 택수곤


~군자는 곤할수록 더욱더  굳어지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곤해도 마음이 변하지 않고 견고하게 나아가므로 형통하고 바른 것이죠. 비록 몸은 곤하지만 마음은 곤하지 않다는 말 입니다.~

~아무리 대인 군자라고 해도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곤한 사람의 말은 믿어주지를 않아요. 남이 믿어주지 않는 말은 차라리 하지 말고 그저 마음으로 형통하고 바르게 나아가는 것이 좋지요. 그래서 有言不信(유언불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총설
사람이 곤궁해지면 그것을 못 참고 잘못하여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품이나 덕을 알려면 곤한데 있어봐야 하기에, 주역 [계사전] 구덕괘(九德卦)에 困은 덕을 분별할 수 있는 괘(困은 德之辨也)라 했습니다.~


[출처: '대산주역강의-김석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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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균형.
신체에 위기가 왔을 때는 마음을 잘 다스려서 위기에 처한 신체와 마음의 균형을 잡기위해 노력하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반대로 마음에 위기가 왔을 때는 운동 등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여 마음과 몸이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치 타인을 용서하는 과정에서 마음은 쉽게 용서를 하지 못하지만, 내 몸을 겸허히 숙이는 몸짓을 통해서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작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곤경에 처해있는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일일이 타인들과 만날 때마다 나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침묵하는 대신, 우선적으로 내가 해야할 일을 열심히해서 미래에 결과물로써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곤궁한 상황이 아닐 때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을 범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위기에 처했을 때야말로 그 사람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삶에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피하려 애쓰지 말고 정신을 가다듬고 돌직구를 던질 마음으로 그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을 도약시키는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일이 잘풀릴 땐 앞으로 닥칠 위기를 생각하고, 위기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는 앞으로 맞이하게될 기회를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개인적으로 아직까진 이런 삶의 태도가 내 인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4-03-21

TED_ 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철학- Alain de Botton 알랭 드 보통

TED라는 곳에서 알랭 드 보통의 강연을 예전에 동영상으로 보다가 한글로 해석된 스크립트를 복사하여 정리한 적이있었다. 동영상으로 한 번, 스크립트만 다시 한 번, 다시 동영상 한 번, 워드파일로 만들면서 다시 한 번을 읽다보니 괜찮은 내용이었다. 16분정도의 분량이라 내용이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읽기 시작했다면 끝까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정말 뭔가 영감을 얻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내용이 맞다는 것은 아니니, 개인에 따라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면서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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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공철학



제 경우에는 커리어의 위기가 보통 일요일 저녁에 찾아오곤 합니다. 해가 막 질 무렵이 되면 제 자신에 대한 저의 희망과 삶의 현실 사이의 간극이 고통스럽게 커지기 시작하고 결국 전 베개에 얼굴을 묻고 훌쩍이게 되죠.
제가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는 주기적으로 커리어의 위기가 찾아와 주춤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우리의 생활이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이 일종의 위협적인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한 삶을 살기가 쉬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리어에 대한 불안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죠. 그래서 이제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커리어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지 말이죠. 왜 우리가 커리어 위기의 희생자가 돼서 베개를 눈물로 적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 속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 나쁜 소식을 전해야겠네요. 특히 해외에서 옥스포드에 오신 분들에겐 그럴 겁니다. 속물근성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속물근성이 영국만의 특징적 현상이라고 생각하죠. 시골의 별장이나 직위에 집착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속물근성은 글로벌 현상입니다. 우리는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고 이건 글로벌한 현상입니다. 실제로 나타나고 있죠.
속물이란 게 뭘까요? 속물은 누구든 당신의 작은 일부분을 가지고 당신의 사람됨 전체를 정의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속물근성이죠. 그리고 속물근성 중에서도 오늘날 두드러지는 건 직업에 대한 속물적 태도입니다. 파티에 가자마자 몇 분 후면 겪게 되죠. 21세기 초를 사는 현대인에겐 너무나 익숙한 대표적인 질문 “무슨 일 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거든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당신을 만난 걸 엄청나게 기뻐하거나 아니면 시계를 보면서 핑계를 대고 사라집니다. (웃음)
그럼 속물의 반대는? 우리들의 어머니입니다. (웃음) 여러분이나 제 어머니가 그렇다기보다는 이상적인 어머니가 그렇다는 거죠. 어머니에게는 자식이 성취한 바가 중요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죠. 사람들은 대부분 타인에게 투자하는 시간의 양을 그들에 대한 애정과 엄격히 연결지어 생각합니다. 꼭 연인간의 애정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애정과 존중을 얼마만큼 허용할 수 있느냐와 연결짓고 이는 엄격하게 사회적 계층구조 상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죠.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커리어에 대해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겁니다.
또 물질적인 것에도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하죠. 아시다시피 우리는 아주 물질적인 시대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탐욕스럽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저는 우리가 특별히 물질적인 것 같진 않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가 사는 사회는 단지 어떤 감정적 보상을 물질의 취득과 연결시킨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사치품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 페라리(스포츠카)를 몰고 가는 사람을 보시거든 ‘저 사람은 참 탐욕적이로군’ 이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상처받기 쉽고 애정이 결핍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다시 말해서(웃음) 경멸하기 보다는 동정하시란 겁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웃음) 또 다른 이유를 말씀드리죠. 요즈음의 우리가 과거보다 평정을 찾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비교적 좋은 것과 연계되어 있으니 모순이랄 수 있는데 바로 우리 모두가 커리어에 대해 갖는 희망입니다. 지금처럼 기대가 컸던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일생동안 이룰 수 있는 업적에 대한 기대 말이죠. 우리는 여기저기서 누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얘길 듣습니다. 카스트제는 폐지되었죠. 오늘날의 시스템에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지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숭고한 생각이죠. 여기에는 평등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본적으로 평등하죠. 엄격하게 정의된 계층구조가 없습니다. 여기서 바로 정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시기심이죠. 시기심, 하지만 현대 사회에 하나의 지배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질투입니다. 그리고 이건 평등의 정신과 연결돼 있어요.
설명을 드리죠. 여기 계신 분들이나 동영상을 보고 계신 분들 중에 영국 여왕을 시기하는 분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 분이 여러분들보다 훨씬 부자인데도 말이죠. 그 분은 아주 큰 집도 갖고 있죠. 우리가 여왕을 부러워하지 않는 건 그녀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우리가 공감할 수가 없는 거죠. 말투도 희한하고 출신지도 특이합니다. 그래서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시기하지도 않죠. 두 사람이 나이 서로를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시기할 위험도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말인데 여러분들 모두 동창회에는 절대 가시면 안됩니다. 왜냐면 비교평가의 잣대로 동창생만한 기준이 없거든요.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제는 세상 전체를 학교로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모두 청바지를 입고 그러면서도 또 꼭 같지만은 않거든요. 결국 평등의 정신이 뿌리깊은 불평등과 결합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스트레스 심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죠. 아마도 오늘날 여러분이 빌 게이츠만큼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는 건 17세기에 여러분이 프랑스 귀족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잡지나 여러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건 열정과 몇 가지 기발한 기술적 아이디어 우리도 대단한 일을 벌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죠. (웃음) 그리고 이런 기대감의 결과는 서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형 서점의 자기계발서 코너에 한번 가보세요. 저는 가끔 가는데요 요즘 나오고 있는 자기계발서들을 분석해보면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이룰 수 있어요! 뭐든 가능합니다!’라고 하는 종류가 있고 또 다른 종류는 어떻게 고상한 말로 하면 ‘낮은 자존감’, '자신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움'에 대처할 지 가르쳐주죠. 여기에는 실질적인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와 낮은 자존감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죠. 이처럼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 고약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커리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불안해하고 있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좋은 것이란 바로 성과주의입니다. 지금은 정치인도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성과주의가 훌륭한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우리 사회가 정말 성과주의를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런데 성과주의 사회란 뭔가요?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재능과 열정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훌륭한 생각입니다. 문제는 정말 우리 사회가 위로 오를만한 사람이 올라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아주 고약한 생각까지도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즉 밑바닥으로 가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에서의 위치는 우연이 아니라 각자가 자초한 마땅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실패의 충격은 더 가혹해집니다. 아시다시피 중세 영국에서는 아주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불운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글자 그대로 행운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행한 사람이란 거죠.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는 사회 최하층의 사람을 만나면 이들을 몰인정하게도 ‘실패자’라고 부릅니다. 불운한 사람과 실패자 사이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죠. 이는 지난 400년간 사회가 변화하였으며 삶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더 이상 신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 있죠. 우리가 잘 나가고 있다면 이건 고무적이지만 아니라면 타격이 크죠. 최악의 경우 이런 상황은 자살율의 증가로 이어집니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개인주의적 선진국의 자살율이 높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본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극도로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인정하지만 실패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은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도대체 없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얘기해보죠. 성과주의를 생각해볼까요. 모든 사람이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 저는 그건 완전히 말도 안되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저는 어떤 정치가든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성과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을 지지할 겁니다. 그런 점에선 저도 성과주의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젠가 진정한 성과주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건 미친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불가능한 꿈이죠. 우리가 사회에서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 대해 등급을 매겨서 좋은 사람은 상층에 마땅히 돼야 하는 대로 정확히 구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연적 요소가 너무나 많으니까요. 돌발적 사고 갑자기 무언가 머리 위에 떨어지는 사고 이 모든 것에 따라 등급을 매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합당한 등급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거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 제가 좋아하는 멋진 말이 있습니다. “인간을 그 지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이죠. 현대 언어로 해석하면 당신이 만나는 누군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그 명함을 보고 판단하는 건 죄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중요한 건 지위가 아닙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오직 하느님만이 모든 사람을 그 합당한 자리에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판의 날 그렇게 할 겁니다. 천사와 나팔 소리에 둘러싸여 하늘이 열리면서 말이죠. 물론 그래도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즉 누구든 다른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반드시 알 수는 없는 거니까요.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아는 양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 우리에게 위안을 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나 실패에 대해 생각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단지 소득이나 지위를 잃어버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운 건 남들의 판단과 비웃음이죠.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런 비웃음을 가장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 매체가 요즘의 경우에는 신문입니다. 일주일 중 언제라도 신문을 펼쳐보면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들 얘기로 넘쳐나죠. 잘못된 사람과 잠을 잤다, 잘못된 법안을 통과시켰다, 비웃음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실패한 거죠. 그래서 이들을 '실패자'라고 정의합니다.
이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요? 서구의 전통이 한 가지 훌륭한 대안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비극입니다. 비극적 예술은 고대 그리스의 극장에서 기원전 5세기에 발전되었던 예술의 한 형태로 인간이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동정심도 허용했죠. 이들의 삶이 평범했다면 동정 받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일요 스포츠'를 사러 갔습니다. 타블로이드 신문인데 여러분들께는 추천하지 않겠습니다. 아직까지 애독자가 아니시라면 말이죠. 그리고 그 신문사에 가서 얘길했죠. 서구 예술의 위대한 비극들에 대해서요. 저는 이 사람들이 이야기의 뼈대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뉴스 아이템으로 잡아내서 토요일 오후 뉴스데스크에서 기사를 쓰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오델로에 대해 말해줬죠. 들어본 적은 없지만 무척 흥미롭다더군요. (웃음) 그리고 저는 오델로 이야기의 헤드라인을 뽑아달라고 했죠. '사랑에 미친 이주민 라는 기사 제목이 나왔습니다. 이번엔 보바리 부인 줄거리도 얘기해 줬습니다. 이 책도 재미있겠다고 하면서 쇼핑 중독에 걸친 탕녀 (웃음) 다음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얘깁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이 방면에선 타고난 천재인 것 같아요. 제일 재미있었던 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었어요. 엄마와의 섹스는 눈이 멀 정도로 황홀했다(웃음) (박수) 어떤 면에서 동정심의 한쪽 끝에는 타블로이드 신문이 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비극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주장하는 건 우리 모두 조금씩은 비극에서 나타나는 상황에 대해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햄릿을 실패자라고 하는 건 말도 안되죠. 그는 실패하긴 했지만 실패자는 아닙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이자 이것이 정말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의 또 다른 측면이자 현대 사회가 이런 불안감을 야기하는 원인은 현대 사회의 중심에서 인간이 아닌 것은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사회는 인류 최초로 우리 자신 말고는 아무 것도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하죠. 그도 그럴 만하죠. 우리는 인간을 달에 보내고 여러가지 엄청난 일들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웅은 인간적 영웅이죠. 이것은 아주 새로운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사회에서는 그 중심에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숭배가 있었죠. 신 무엇이든 간에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습관을 다소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이 특히 자연에 끌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종종 그런 식으로 포장되곤 하지만 사실 자연이야말로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끼리의 경쟁에서 벗어나고 인간사의 드라마에서도 벗어나는 거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빙하나 바다를 보는 걸 즐기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를 느껴보고 싶어하는 거죠. 이것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결국 성공과 실패에 관한 겁니다. 성공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우리가 그 의미를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께 저 스크린 뒤에 누군가 아주 크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즉각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영역에서 명성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성공에 관한 저만의 이론을 말씀 드리죠. 사실 저는 성공에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정말 성공하고 싶습니다. 저는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성공할 수 있지?’하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성공' 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성공에 대해 깨달은 바를 말씀 드리죠. 모든 것에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일과 생활의 균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데 말도 안 돼죠. 다 가질 순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성공에 대한 어떤 비전이든 대신 무언가를 대가로 치뤄야한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대신해서 잃어버리는 게 무엇인지 말이죠. 그리고 제 생각엔 현명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인정할 겁니다. 성공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때 그건 우리 본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흡수한 거죠. 주로 남자라면 아버지의 생각 여자라면 어머니의 생각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80년 동안 이 얘기를 해 왔는데 충분히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죠. 저는 진심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부터도 메시지를 흡수합니다. 텔레비전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으로부터요. 이런 것들은 강력한 영향을 끼쳐 우리가 원하는 것 은행원이 아주 괜찮은 직업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은행권에서 일하고 싶어하다가 은행원이 더 이상 그다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사람은 관심을 잃죠. 아주 열린 마음으로 다른 조언을 들으려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우리가 성공에 대한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게 반드시 본인이 생각하는 성공이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자신의 생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인의 생각을 확고히 하고 우리 자신의 야망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 보다 더 나쁜 건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안다고 생각했다가 그 여정의 끝에서 자기가 원한 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제 말씀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만 제가 정말 강조하고 싶은 건 반드시 성공하시라는 겁니다. 단 성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것이 진정 각자 자신이 원하는 성공이 되도록 합시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박수) (null)
 어떻게 하면 두 가지를 양립시킬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건 나쁘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삶을 컨트롤하고 싶어하고 이를 권장하는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공한 사람과 실패자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요? (null)
성공과 실패의 과정에 포함된다는 걸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너무 모든 것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이에요. 정치가들은 항상 정의에 대해 말하죠. 저 역시 정의를 믿습니다. 단지 실현 불가능하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건 우리가 누구와 만나든 우연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할 거란 사실입니다. 저는 단지 그 우연성을 충분히 고려하자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폐쇄적이 돼버릴 수 있어요. (null)
본인의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한 일에 대한 철학과 성공적 경제를 결합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시나요? 그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데 우리가 너무 강조하고 있는 건가요? (null)
사람들을 겁주는 게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어째선지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도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상적인 아버지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생각해 보면 보통은 엄하면서 자애로운 아버지상을 원합니다. 그런데 그 선을 긋기가 아주 어렵죠. 우리에게는 사회의 귀감이 될 만한 아버지상이 필요한데 양 극단은 피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규율만 강조해서도 안되고 반대로 느슨하고 규칙이 전혀 없는 유형도 아니어야 하죠. (null) (null) (박수)


[논어 한 구절] 배우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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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공자께서 말하길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도 아니하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도 아니하고, 생각에만 골몰하여도 보았으나 별 유익함이 없었다. 역시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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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고민하는 시간만큼, 깊게 공부하여 배우는 것이 균형을 이뤄야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구절이다. 생각만하다보면 자칫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세상과는 단절된 자신만의 울타리를 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그래서 세상과의 소통하는 역할로써 배움을 통해 현재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수정하고 보완해야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 말은 '언행일치'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과정의 중요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이란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이란 아무 이유도 없이 오늘 죽기도 혹은 내일 살기도 한다는 것을,~



[출처:<<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2>>- 박경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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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건강을 지키기 위해 평소의 습관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잘 하지 못하다.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적절한 운동을하고 식습관을 가진다. 하지만 위기를 꼭 겪고 나서 깨닫는 것보다 평소에도 나름의 노력을 통해 소중한 것들을 자각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건강 뿐이겠는가?
내일 내가 지금처럼 숨을 쉴 수 있다는 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음에도 대부분은 내일과 미래에 행복을 유보 시키고 있다. 어느 누구의 말처럼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할 수 없어요"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래를 상상하며 생각하는 행복은 혹여나 내가 직접 미래의 상황에 처하게되었을 때 과거의 내 상상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너무 나도 불확실한 미래에 너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지금 이 순간이 내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내 삶을 제어할 수 있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일전에 어느 모임에서 사랑과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여성분에게 어느 남성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헌데 이 여성분은 남자를 소개해주려는 분께 상대방 남자의 사진과 이것저것에 대해 묻고 있었다. "혼인하면 아무리 못해도 30년은 같이 살아야 할텐데..."라고 시작되는 이 여성의 말을 듣고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었다. 왜 30년을 같이 살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극히 드문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혼인을 하고 바로 다음날에라도 둘 중 누군가는 세상과 작별을 할 수도 있을 텐데...일단...그냥...한 번 만나보면 안되나?...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있다.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생각은 일전에 스티브잡스도 연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삶의 본질을 제대로 직면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랑하는 연인과 사소한 일로 싸우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나를 기억시키게 하기 위한 이타심을 내세운 이기심을 통해 진정한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내일 어찌될지 모르고, 사랑하는 상대방이 내일 어찌될지 모른다.


book 선방일기- 지허스님 지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스님도 어쩌면 우리와 같은 사람이였구나.'였다. 스님들의 생활이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배고픔(식욕)에 시달리다가 창고에서 몰래 감자서리를 하여 구워먹다 창고담당 스님에게 걸리는 이야기, 만두국을 만들기 위해서 만두피를 만들면서 남자의 거시기와 여자의 거시기를 만들면서 서로가 웃는 이야기(성욕), 아프다는 핑계로 뒷방(수행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에 전세를 놓고 아예 살다시피 하는 스님이야기(수면욕), 동자승들의 피터지는 싸움 이야기 등등...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한 스님의 관점에서 일기(日記) 형식으로 쓰여있기 때문이다.

분량이 그리 많은 책은 아니었지만, 내 경우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옆에 사전을 두고 한문으로 된 용어들을 찾느라 약간의 고생을 한 까닭일까? 아니면 절판 된 책이라서 서점에서 따로 주문을 하여 10일만에 책을 받아 보았기 때문일까?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내 머릿속의 지식들 때문일까? 어쩌면 이 책은 지금 이 순간 종교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 특히, 지금 살고있는 세상과는 달라보이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사람에게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와 내가 직접 그 입장이 되었을 때 느끼는 느낌은 다를 것이라는 개인적인 판단 때문이다. 어느 스님의 일기를 통해 '과연 내가 생각하는 수행생활이었나?'에 대해서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인생에서 상당히 심각한 위기를 겪으면서 만나게 되었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 결국 속세에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얼마든지 삶에 대한 본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냈었던 적이 있다. 어쩌면 내가 찾는 삶의 본질은 인간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너무 형이상학적사유에 빠지지 않으면서 사회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고, 너무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아니, 누구나 한 번은 종교적 관점을 떠나서 읽어 봤으면 하는 바람이있다.

인간의 삶에 있어 종교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있고 없음에 따라 종교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종교가 없어도 종교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는 인간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단순히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그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하고 싶었던 삶의 본질적인 내용을 직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


2014-03-20

요한복음(8:7)...영어성경(RSV)를 읽다가...

예전에 영어성경(RSV)으로 '요한복음'을 잠깐 보면서 영어를 공부했던 적이있다. 문득 기억이 나는 좋은 문장이 생각나서 적어본다.



~ Let him who is without sin among you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 (요한복음 8:7)

~ But when they heard it, they went away, one by one, beginning with the eldest, and Jesus was left alone with the woman standing before him. ~ (요한복음 8:9)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 예수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요한복음 8장 초반부를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이 문장들에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쉽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이 행했던 여러 잘못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만, 타인의 잘못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지도 모른다.



타임지 선정 20세기 최고의 책 100선

Ⅰ. 문학

1. D.H.로렌스/ 아들과 연인/ 1913
2. 루쉰/ 아큐정전/ 1921
3. 엘리엇/ 황무지/ 1922
4.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1922
5. 토마스 만/ 마의 산/ 1924
6. 카프카/ 심판/ 1925(?)
7.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7
8.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1927
9. 헤밍웨이/ 무기여 잘있거라/ 1929
10. 레마르크/ 서부전선 이상없다/ 1929
11.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1932
12. 앙드레 말로/ 인간조건/ 1933
13.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939
14. 리처드 라이트/ 토박이/ 1940
15. 브레히트/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1941
16. 카뮈/ 이방인/ 1942
17. 조지 오웰/ 1984/ 1948
18. 사뮈엘 베게트/ 고도를 기다리며/ 1952
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1955
20.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1956
21.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957
22.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1957
23. 치누아 아체베/ 무너져내린다/ 1958
24. 귄터 그라스/ 양철북/ 1959
25. 조지프 헬러/ 캐치 22/ 1961
26.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1962
27.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1967
28.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980
29.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
30.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1989


II. 인문

1.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1900
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일반언어학강의/ 1916
3.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1920
4. 라다크리슈난/ 인도철학사/ 1923~27
5. 지외르지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1923
6.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927
7. 펑유란/ 중국철학사/ 1930
8. 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1931~64
9. 마오쩌둥/ 모순론/ 1937
1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이성과 혁명/ 1941
11. 장 폴 사릍르/ 존재와 무/ 1943
12. 칼 포퍼/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945
13.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1947
14. 시몬 드 보봐르/ 제2의 성/ 1949
1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951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953
17. 미르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1957
18. 에드워드 헬렛 카/ 역사란 무엇인가/ 1961
19.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1962
20. 에릭 홉스봄/ 혁명의 시대/ 1962
21.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이념/ 1964
22. 미셸 푸코/ 말과 사물/ 1966
23. 노엄 촘스키/ 언어와 정신/ 1968
24. 베르터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1969
25.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앙티오이디푸스/ 1972
26. 에리히 프롬/ 소유냐 삶이냐/ 1976
27.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1978
28.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979
29. 피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1979
30. 위르겐 하버마스/ 소통행위이론/ 1981


III. 사회

1. 브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1902
2.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과학적 관리법/ 1911
3.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1926~37
4.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1932
5.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이자.화폐 일반이론/ 1936
6. 윌리엄 베버리지/ 사회보험과 관련 사업/ 1942
7. 앙리 조르주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1947
8. 앨프리드 킨지/ 남성의 성행위/ 1948
9.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1950
10. 조지프 슘페터/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1950
11. 존 갤브레이스/ 미국의 자본주의/ 1951
12. 대니얼 벨/ 이데올로기의 종언/ 1960
13. 에드워드 톰슨/ 영국노동계급의형성/ 1964
14.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1964
15. 마셜 맥루헌/ 미디어의 이해/ 1964
16.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1970
17. 존 롤스/ 정의론/ 1971
18. 이매뉴얼 위러스틴/ 세계체제론/ 1976
19.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1980
20. 폴 케네디/ 강대국의 흥망/ 1987


IV. 과학

1. 알버트 아인슈타인/ 상대성원리/ 1918
2. 노버트 비너/ 사이버네틱스/ 1948
3. 조지프 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 1954
4.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1962
5. 제임스 워트슨/ 유전자의 분자생물학/ 1965
6. 제임스 러브록/ 가이아/ 1978
7. 에드워드 윌슨/ 사회생물학/ 1980
8. 칼 세이건/ 코스모스/ 1980
9. 이리야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0.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1988


V. 예술,기타

1. 헬렌 켈러/ 헬렌 켈러 자서전/ 1903
2.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1926
3. 마하트마 간디/ 자서전/ 1927~29
4. 에드거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1937
5. 아놀드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940~50
6.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1947
7.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948
8. 말콤 엑스/ 말콤 엑스의 자서전/ 1966
9. 에른스트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1975
10. 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긴 여정/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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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를 고를때 참고하면 좋을 책 정보!!


영화_ 마이 플레이스 My Place





한 가정의 일대기를 영상에 담은 영화이다.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시작하여 어떤 세부적인 사항들이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대해 고민하게됐다. 캐나다와 한국을 10여년 간격으로 이동하며 살면서 가족은 각 국가의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다. 특히 이에 대한 영향은 자녀들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했다(특히 딸). 캐나다의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에서 생활하던 딸은 한국의 교육제도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반면 오빠의 경우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숨김으로써 한국의 문화에 적응해간다. 하지만 여동생은 적응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를 뛰어넘는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된다. 바로 아이를 혼자 낳아서 키우는 것을 통해서...


처음에 오빠는 여동생의 그런 판단과 행동에 우려를 하게되고, 자신의 영화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족을 영상에 담기 시작한다. 그런 과정에서 가족들을 인터뷰 하면서, 부모님과 여동생의 속마음에 더욱 깊게 다가가게 된다. 아마도 가족들은 이 과정에서 응어리진 마음들을 서로 보듬어주면서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해 간 것 같다. 여동생은 결국 아이를 낳아 캐나다에서 키운다. 영화 말미에서 오빠는 처음엔 우려했던 여동생의 행동 덕분에 자신의 마음이 치유된 것 같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괜찮았던 영화였다. 그냥 조금은 특이할 수 있는 한 가정의 일상들을 찍어낸 것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기도 했다. 타인의 삶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도 결국은 내가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소설가는 "인생은 재공연을 할 수 없는 단 한편의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서 미처 내 삶의 소중함과 내가 내 삶을 주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에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