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4

story_ (3)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까?- 부모의 뒷모습2

결국 C는 S에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중요함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더욱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서도 '부모님의 뒷모습'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S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 C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C는 S가 이야기 듣는 태도에 감동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S님께 제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게요. 어느 두 가정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가정은 부모님이 서로를 아껴주고, 위기가 왔을 때는 서로 힘이 되어 지혜롭게 위기를 딛고 일어날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이고, 다른 한 가정은 부모가 매번 다투고,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이미 답은 나와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삶을 행복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요?"

S는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처음에 말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죠"

C는 말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이 생각에는 상당한 착오가 있어요. '어린시절에 행복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도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지만, 불행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계속 불행하게 살거나 더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그러니 이것을 안다면, 불행한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행복했던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수 백배, 수천 배의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구호는 컴플렉스의 반영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흔히 우리는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미 우리 삶이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하세요"라고 입이 닳도록 반복할 필요가 없을텐데, 현실에서 실현이 어려우니 구호화되어 반복적으로 외치고만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망각한 채 더 많은 노력도 없이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사람이 해야할 노력과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해야할 노력에 엄연히 큰 차이가 있음에도 이를 직시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를일이다. 불행했던 사람은 어쩌면 "행복"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노력하기 앞서서 가야할 길이 상당히 멀고 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고 먼 여정을 떠나는 것과 그걸 모른 채 좌충우돌하는 것과는 상당히 큰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낼 것 같다.

점점 S는 우리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C의 구체적인 설명에 빠져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남편은 어땠는지 생각해봤다. S의 남편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밖에 나가 돈만 버는데 집중한 게 아니라 집에와 남는 시간이 있을 때면 아이들을 돌봐줬고, 아이들 기저귀도 손수 갈아주었던 사람이었다. 그 때는 이런 남편의 행동이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인지 몰랐는데, C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S는 남편에 대해 애뜻한 감정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 소설가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린 아들과 산책을 할 때, 아들은 저만치에 혼자 떨어져 걷고 아내와만 손을 잡고 걸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거의 확언하건데, 이 아이는 잘 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함"에 대해 어느 강연에서 말한 적도 있는데, 이 분의 이 말에도 상당한 통찰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이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버지가 그립습니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이 연사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큰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이것은 논리적으로 수치화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간과한다. 아주 사소한 예를 들어보면, 욕설을 너무 지나치게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욕설 뿐만아니라 매사 불평과 불만 그리고 냉소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개인적으로 이는 그 사람의 잘못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그 사람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 사람이 지나친 욕설을 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의 영향이 상당히 컸기 때문이다. 그런 자녀를 보며 부모는 "왜 그리 욕을 하니?"라고 나무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이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언젠가 만난 어느 초등학생이 이런 말을했던 적이 있다. "제 친구는 너무 욕을 많이해요." "그럼 너는 그 친구처럼 욕을 안해?"라고 물으니 녀석의 대답에 얼음이 됐다. "욕이요? 별로요. 왜 욕을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물었다. "너 부모님이 서로 싸우실 때 욕 안하시니?" 이에 대한 녀석의 대답은 더 대단했다. "부모님 안 싸우시는데요. 그리고 욕을 하시는 적을 본적이 없어요."

우리가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놓치고 있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으신지...

부모가 되는 것은 쉬울 수 있지만, "부모님"이 되는 건 쉬운 게 아닌지도 모른다.


2014-06-22

movie_ Blue Is the Warmest Color 가장 따뜻한 색, 블루


La Vie d'Adèle
Blue Is the Warmest Color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이야기의 주내용이 동성애(레즈비언)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본질은 아닌 것 같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정체성"..."자기성찰"..."자기혁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소녀는 자신과는 어쩌면 다른 소녀를 만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토해내려고 애쓴다. 토해내려는 것이 무언지도 제대로 모른채 이 소녀는 방황하고 있는 듯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끊임없이 교차했다. 이 소녀의 방황에 대해 소녀에게만 책임을 묻기가 난감하다. 어쩌면 이 소녀의 방황은 너무 오랜 세월동안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큰 이유일 수도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소녀(아델)는 '사랑'에서도 미숙함을 보이게 된다. 물론, 소녀의 나이가 극중에서 어린 것도 이유일 수 있겠지만, 소녀는 '외로움'과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 했다. 그래서 소녀는 몹시도 혼란스러워했는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이 소녀는 방황하고 있었다. 자신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변화의 한 걸음을 내딛는 걸 두려워하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인간은 혁신하기 힘들어진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낸 엠마는 자신의 작품을 유명한 갤러리에 전시하게된다. 이미 남남이 되어버린 아델은 엠마의 전시회에 찾아온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아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엠마와의 추억에 의지한 채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엠마가 자신의 삶에서 주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아델은 그런 엠마에 의지한 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삶의 주인으로서 만나 서로 사랑하길 엠마는 원했지만, 아델은 그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시선, 그리고 사회가 만든 틀을 깨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되어 혁신한다는 건 수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러함에도 끊임없는 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과 비교해서 늦을 수도 있지만, 인생을 장기적 안목에서 봤을 때 더 오래 더 멀리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혁신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인데, 자신의 기억에는 거의 없는 어릴적 가정환경을 직면하는 것이 아닐런지...특히 부모님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숙고해야지 않을런지... 객관적인 관점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긍정적인 영향은 더욱 발전 시키고, 부정적인 영향은 최선을 다해 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모로부터 경제적,육체적으로 독립 했다고 진정 독립했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와는 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부모의 그림자는 자식을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동성애(레즈비언)에 대한 거부감만 없다면 추천하고 싶은 영화다. 지인의 추천으로 본 영화인데 의미있게 봤다.


2014-06-21

movie_ Rules of Dating 연애의 목적






한 남자의 무분별한 성적 욕망이 어떻게 한 여인에게 상처를 주는지를 그린 영화가 아닐런지... 진정한 사랑의 바탕 위에서 욕망하는 성적 쾌락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성적 욕망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인간의 역사에서 탐욕과 성욕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을 놓고 봤을 때, 우리의 삶이 빠르게 변화하는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은 쉽게 변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은 계속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그 비겁함들로 인해 거의 모든 것들을 잃고난 뒤에야 뒤늦게 후회하는데, 안타깝다기 보다는 인과응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영화에서만 다루기 위해 꾸며낸 상상 속의 이야기인지가 궁금해지는....




2014-06-18

book 스트레스 없는 재테크 10가지 습관- 김재영 지음





축구선수가 멋진 기술을 관중에서 선보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기본기"일 것이다. 기본이 탄탄하지 않으면 고급기술을 사용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 책도 이 맥락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특별한 투자법에 주목하기 보다는 먼저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말을 여러 문장에서 보이지 않게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식투자를 통해 몇 배의 수익을 얻는 것 뒤에는 그 만큼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 감당해야하는 위험(Risk)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주식투자에 앞서 은행의 정기예금을 통해서 복리의 위대함을 체험해 보라고 권한다. 주식투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에는 조금이라도 위험이 존재하며, 그 위험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행의 정기예금은 아무런 위험 없이 이자수익을 얻게 해준다.

여기서는 일반인과 부자의 생각을 잠시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1,000,000원(백만원)을 연5% 정기예금에 넣은 일반인의 경우와 1,000,000,000원(10억)을 연5%의 정기예금에 예금한 부자의 경우를 잠시 비교해보자. (세금계산은 생략하고) 일반인은 이자수익으로 50,000원을 얻게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자율의 중요성을 크게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액수다. 하지만 부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부자는 아무런 위험 없이 이자수익으로 50,000,000원(5천만원)을 얻게된다.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고 직장인의 연봉에 맞먹는 수익을 얻게되는 것이다. 이는 부자들이 왜 그토록 "이자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주식투자에서도 일반인과 부자의 투자 방식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투자원금의 수 십배를 기대하는 일반인들의 투자성향과는 다르게 부자들은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이자율보다 조금 높은 수익을 기대한다(주식투자의 경우 은행 정기예금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는 것이기 때문에). 때문에 부자들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고 안정적이면서 혹시라도 경제에 위기가 왔을 때에도 견뎌낼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한다. 그래서 어느 누군가는 말했었다. "본인이 100억 1000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경제를 바라보세요."라고...

'기본에 충실하라'라는 측면에서 이 책이 본질적으로 기본을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실제 생활에서 적용할만한 경제관련 주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본에 충실히 경제 공부를 하고자한다면, 경제원론부터 시작해서 경제사, 화폐와 금융, 국제무역 등의 원론 서적을 공부해야할 것이다. 그 지식들이 바탕이 되어야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인분이 재산을 관리하는 걸 어려워 하시는 듯하여 선물로 드렸던 책이기도 하다.


2014-06-17

movie_ Dead Poets Society 죽은 시인의 사회 (1989)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대사 중 하나는 아마도 카르페 디엠(carpe diem)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에 대해 '현재를 즐겨라'라고 이해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를 즐긴다는 의미보다는 '현재에 깨어있음' 또는 '현재에 최선을 다함'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내일 이 세상에서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는 극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현재 내가 할수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라는 의미가 아닐런지...

밝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잠시 유보하겠다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목표로 상정한 미래의 어느 지점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보장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현재가 원인이 되어 미래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상당히 깊은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것 같다.

영화에서는 틀에 아이들을 가두려는 교육에 일침을 가한다. 시(Poetry)를 감상하면서 시험을 위해 공부하다보니 시가 본질적으로 전달하고자하는 내용들을 상당부분 놓치는 일들이 발생한다.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노력은 시험에서 측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정말 중요한 이런 것들을 놓치고 있는 교육시스템에 냉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사람.
당대적인 관점에서 이상하게 보인 사람이 미래에는 통찰(insight)을 겸비한 사람으로 주목 받을 수도 있다. 반면 이상하긴 한데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이상함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이 두 사람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타인과 비슷한 생각과 행동양식을 유지하는 사람이 과연 타인과 비교하여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낼 수 있을런지... 그보다는 일단은 타인들과의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도 무언가는 이상한 생각과 행동들을 시도해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이상한 생각과 행동들에 대한 것.

지인의 추천으로 본 영화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원작소설도 있다.


2014-06-16

movie_ Assault on Wall Street 월스트리트: 분노의 복수





작은 분노들이 모여 언젠가는 큰 분노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높은 산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조를 제어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높은 산의 정상이 아닌 저 밑에 있는 산의 입구에서 정상을 바라보는 것은 전체의 구조를 파악하기는 쉽지도 않을 뿐더러 정상을 향에 올라가느라 정신 없는 상황이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이 이와 비슷한 모습은 아닐런지... 올라야할 산은 여러 종류의 형태로 다양한데, 고집스럽게 하나의 산만 오르려는 것은 아닌지...

평범한 시민이었던 한 남자가 시스템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잔잔했던 호수에 벼락이 내리치는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정의(Justice)가 사라진 사회에 대한 일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경쟁과 긍정적인 욕망은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것이 임계점을 치고 올라 지나치게 되었을 때는 타인에게 큰 해악을 끼침은 물론 그 자신까지도 어둠의 삶 속에서 고통 받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이미 자본은 어마어마한 힘(Force)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우리 눈에 보이는 총, 칼의 위압감보다 더 큰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힘을 가진 사람들은 전체를 통제하려하고 통제 당하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돈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의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movie_ A Dangerous Method 데인저러스 메소드





흥미를 위한 영화는 아니다. 중간 중간에 야한 장면도 등장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역사적인 부분에서의 논쟁에 대한 내용이 전개되는 영화이다. 그런 측면에서 야한 장면도 그다지 큰 설레임을 주진 못하는 것 같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샤비나 슈필라인(Sabina Spielrein, 1885-1942)

이 세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인간의 정신(마음)을 각자가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에 대한 내용들을 영화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과 관련된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양 뿐만아니라 동양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도 서양의 관점과 견주어가며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성적 욕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갈수록 금기들이 깨지고 있다할지라도 성(sex)이라는 영역에서의 금기가 어느 정도까지 깨어질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만큼 우리에게 성은 쉽게 공개하기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에 대해 알아내지 못하는한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점에서 그 동안 간과했을 수도 있는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의 의지를 동반한 의식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향에 의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관련된 부분에서의 고민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동반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대부분이 당신이 아주 어릴적 기억에 없는 그 환경의 영향을 통해 지금도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것들은 어쩌면 '무의식'의 영역에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 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것들의 누적이라면 행운일 것이지만, 긍정적이지 못한 것들의 누적이라면 상당히 굳은 마음을 먹고 그것들을 변화 시키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변화 시키고 혁신 시키는 것의 출발점은 이 부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진행 중이다.


2014-06-15

book 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주역(周易)에 관심은 있는데, '해석상의 어려움'과 '분량의 어마함'이라는 이유로 읽기를 주저하시는 분들께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주석에 한자 음과 훈을 잘 해설해 놓아서 보기에 편하고, 주석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해석이 잘 되어있어서 그냥 한글만 읽어도 이해하는데 무리는 없다.

64가지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 8가지의 경우의 수와 또 다른 8가지의 경우의 수가 만나게 되면 64가지의 경우의 수가 만들어지게 된다(8x8=64). 이 책에서는 이 64가지 경우의 수에 해당하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긍정적인 결과를 가지고 올지에 대해 독자에게 실마리를 던져준다.

삶을 살다보면 언제인지 모르게 위기를 겪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 위기를 딛고 더 높게 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그 위기로 인해 긍정적이지 못한 또 다른 위기를 겪는다. 그런 측면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상황을 운명에만 맡기는 것은 어쩌면 아쉬움을 남길지도 모른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위기의 물줄기를 조금이라도 긍정의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런지... 운명일지도 모를 그것이 인간의 진심 어린 최선의 노력과 만나 작은 희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지...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엉망이 되어버리는 처절한 비애감에 빠진 시기였다. 어떻게든 그 위기를 딛고 더 높게 날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고, 책의 어느 한 구절에서 '올바름'과 '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고, 위기일 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정돈해야한다는 생각을 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선 개인 각자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본질은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내용으로 수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당히 큰 위기의 과정에서 만난 이 책이 많은 실마리들을 던져줬다. 결과적으로 그 위기를 슬기롭게 잘 이겨냈다.

주역(周易)의 방대한 내용을 이 책이 모두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약6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의 내용을 통해 주역이 말하고자하는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자를 몰라도 친절하게 한글 해석이 돼어있기 때문에 읽고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2014-06-14

story_ (2)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까? - 부모의 뒷모습1

[......남편 분과의 사이는 어떠신가요?......]


C가 S에게 남편과 진정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은 이 말에는 우리 삶의 중요한 본질적인 부분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S는 C가 뜬금없이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남편과의 사랑에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이렇다.

" ~흔히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과 관련해서 단순히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아오는 것만이 교육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 그건 본질은 놓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아이가 배움을 통해 어느 정도의 지식과 지혜를 함양하는 것도 교육의 목표 중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품성과 인격,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성적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충만한가?에 대한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바탕이 견고하고 튼실해야 더 멀리갈 수 있고, 부수적으로 성적도 좋게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C는 S에게 아이의 학교 등수보다 그 아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S에게 이야기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Mental)이라는 영역의 중요성에 대해 C는 매우 중요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C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갈수록 이야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부분들을 C는 건드리기 시작했다. "~S님 주변에도 자녀들을 두신 분들이 계시죠? 그런데 그 중 유독 자녀에게 집착하는 부모들이 있을 거예요. 이 경우는 거의 대부분이 부부간의 사랑이 돈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이들 앞에서 사랑하는 척하는 걸 말씀드리는 게 아니예요. 부부가 진정 서로를 아껴주고 사랑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느냐에 대해 말씀드리는 거예요. 누구나 '척'은 할 수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가 부모의 앞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아이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생각해요. 앞모습이 아니라요...정말 중요한 부분이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부부가 있는데, 이 부부는 자녀들보다 부부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아이들 몰래 둘이서 맛있는 음식을 시켜먹고 아이들이 집에 오기 전까지 빨리 그 냄새를 없애려고 분주했다고 한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연 어떨까?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하나의 결과물을 소개하자면) 이 부부의 자녀들은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결과가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들 몰래 맛있는 음식을 시켜드셨다는 사실에만 집중해서는 이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본질을 놓치는 것이 된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부부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부가 서로를 진정 위해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 '~뭐. 나 몰래 두 분만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게 서운하긴 하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정말 서로를 사랑하시는구나. 두 분이 서로를 아끼시느라 내게 지나친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니 난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찾아야지.~' 어떤가? 지나친 억지 주장일까?


(계속....)

classic_ THE FOUR SEASONS 사계- Antonio Vivaldi 비발디 (1678~1741)







과거, 학창 시절에 시험을 볼 때마다 시험 도입부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던 선율이 있었다. 바로 비발디의 '사계'라는 작품 중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부분은 바로 그 부분만 반복적으로 들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문맥의 흐름에서 그 선율을 들었느지에 따라 같은 리듬이어도 다른 감정을 몰고오지 않을까?

언젠가 지인분의 자녀들에게 익숙히 들었을 만한 '사계'의 일정 부분을 들려줬다. "어!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요."라며 아이들이 일제히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며 집중했다. 반복적으로 들었던 음에서는 친숙함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이후에 나오는 익숙치 않은 음을 들을 때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린 대부분 (이렇게 익숙한) 여기까지만 듣죠. 그 이후까지도 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야지 않을까요?"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아이들의 눈망울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처음으로 비발디 '사계'를 모두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은 여전히 뇌리를 자극한다. 몇번을 반복해 들어도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이 느껴졌었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아 가끔 대중가요에 눈길이 가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고전으로 돌아오게 되는 듯하다. 인간의 본질적인 그 무엇을 건드리기 때문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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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은 레코드만 꼽아 보아도 화자노(로마 합주단, 1954년 녹음), 이 무지찌(F.아요/1959년 녹음), 매리너(성 마틴 아카데미, A. 러브데이/1970년 녹음), 라 쁘띠트 방드(S.쿠이켄/1979년 녹음), 그리고 카알 뮌힝거(슈투트가르트 실내 관현악단, 1951녹음)의 연주가 있다.~"

-출처: <<이 한 장의 명반>>- 안동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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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IX AYO(펠릭스 아요)가 연주한 음반을 구입했었다. 음반을 구입했을 당시에는 비발디 사계에서 '겨울'을 연주한 부분이 좋았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여름'이 더 듣기에 정겹다. 


[참고]
Vivaldi: Four seasons- I MUSICI

(Spring)
http://youtu.be/YRxB7ssENEk

(Summer)
http://youtu.be/9DWqyUsmxVE

(Autumn)
http://youtu.be/iWeLSSIIDds

(Winter)
http://youtu.be/vZ6BJfz1k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