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6

poetry_ 비로소-고은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순간의 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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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놓았다"가 아니라 "노를 놓쳐버렸다"라는 섬세함에 반복해서 시를 읽게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노를 놓치게 됨으로써 "넓은 물"을 볼 수 있었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관통하는 통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갈수록 시대는 개인에게 노 젓기만을 바라는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잠시 노 젓기를 멈출 때는 피로한 몸을 쉬게할 시간 밖에 없는 듯하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짧은 거리를 가는 것이라면 그냥 노를 젓는 것이 별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인생이라는 먼 여정에서 각자의 노력이 어디를 향하는지 자문하는 과정이 빠진다면 삶의 본질을 빗나가는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좋은 시를 만났다.


2014-11-30

movie_ Don Jon 돈 존




How many Woman know the masturbation number of times of the woman's boyfriend?


재미와 함께 작은 여운을 준 영화.

"사랑" 그리고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 특히, 남자를 알고 싶은 여자들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들에서 의외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너무 진지하지 않으면서도, 흥미와 함께 이야기를 잘 이끌어간다. 욕망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스토리의 힘에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쾌락적 욕망을 건드리는 주제의 내용이 아니라, 그 쾌락적 주제를 인간의 삶과 잘 엮어 냈다는 생각이 든다.

환상 속의 그 남자...그 여자...
현실이 미디어의 프레임에 갇혀 꾸며지는 과정에서 그 미디어를 보는 사람들은 현실을 왜곡하여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그 만큼 미디어에 몰입하는 시간이 많을 수록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의 호흡을 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닐런지...

종교(religion)와 사랑은 어떤 관계일까?
"종교에서의 사랑은 여러 사람을 등에 업을 수는 있지만, 단 한 사람을 업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던 어느 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사랑이라는 단어를 읽으면서 습관적으로 이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사랑을 지금껏 해왔는가?... 종교(religion)는 여전히 인간의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힘을 키우는 듯하다.

사랑을 하는 두 연인이 보면 좋을 영화. 더 구체적으로는 어쩌면 남자를 알고 싶어하는 여자들에게 더 적합할 것 같다. 남자친구의 마스터베이션 주기를 알고 있는 여성들이 과연 얼마나될까?... 여성이 한 달에 한 번씩 치루는 신체적 변화 만큼이나 남성이 끓어오르는 쾌락과 욕망의 분출도 서로 이야기해야하지 않을까...


2014-11-23

movie_ Man of Vendetta 파괴된 사나이





한 인간의 삶이 순식간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같으면서도 마치 상상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내용의 전개가 짜임새 없는 듯 한 느낌이 이 영화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이 영화 속에서 주어진 몇가지 단서들을 기억해 각자의 상상력으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8년동안 나 하루도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었어?"라는 딸의 물음에 극 중 김명민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라진 딸에 대한 고통이 너무 커 김명민은 자기 자신을 망가 뜨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개의 끄덕임'은 유괴된 딸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믿음에  대한 끄덕임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믿음...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민하게 됐다.


2014-11-22

economy_ DEBT is to sell my soul to the devil. 부채는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파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에 대해 고민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채(Debt)는 자유와는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최대한 부채(Debt)와는 거리를 멀리 두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채(Debt)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요즘 느껴지는 분위기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생계 때문에 부채를 져야만 하는 상황은 그렇다치더라도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탐욕에 빠져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부채(Debt)의 늪으로 달려가는  장면들이 종종 목격된다.

얼마 전, 오랜만에 최근 혼인을 한 지인을 만나 식사를 같이 했다. 식사를 빨리 마친 지인은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어서 주식투자도 실시간으로 할 수 있다니깐"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까지는 그다지 큰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는데, 그 다음으로 지인이 하는 말을 듣고는 침묵할 수가 없었다. 지인은 서슴없이 마이너스 통장에서 빌린 돈으로 주식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연배가 있으신 분이었음에도 심각성이 느껴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좀 위험한 투자 아닌가요? 지금 같은 과도기적 경기상황에서 가급적 주식투자는 피하시는 게... 그리고 내 돈이 아닌 빌린 돈으로 주식투자를 한다는 게..." 이 말을 들은 지인은 '초심자의 행운'의 함정에 빠진듯 자신만의 투자 원칙이 있으시다면서 자신감을 보이셨다. 더군다나 지인은 최근 혼인을 하면서 신혼집 관련해서도 대출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지인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지인은 이직을 생각하고 계셨다. 이름을 대면 대부분 알만한 기업에 다니시면서 쌓은 경력을 이용하여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다고 하셨다. 지인께서는 다른 이유를 대셨지만, 개인적으로 본질은 부채(Debt)였다는 생각이 든다. 주기적으로 나가야할 돈이 고정되어 있다보니 이직을 위해 잠시 여유를 가지고 쉬면서 고민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인께서 식사를 대접해주시고 카페에서 차까지 대접해 주신다고하셔서 감사하긴 했지만, 부담스러워서 카페에서는 가장 싼 음료를 주문했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는 빚을 진다는 것에 무감각해져버렸다. 부채(Debt)를 아무런 고민없이 떠 안는다는 것은 인간이 가장 본질적으로 추구하고자하는 '자유'를 악마에게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빌린 돈으로 내가 원하는 물품을 소비하는 자유가 과연 얼마나 인간에게 충족감을 줄 수 있을까? 물품을 소비하고자하는 그 욕망은 본인의 욕망인가? 진정 본인의 욕망인가? 알면서도 하는 것과 모르면서 하는 것에는 엄연히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아직 대한민국 경제는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 가장 큰 핵탄두는 부동산... 부동산에서 파생된 부채가 가계부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최대한 부채를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부채를 져야만 하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부채는 내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최대한 빨리 그 부채를 상환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결국 인간의 본성에는 탐욕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한 말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이 글을 읽고 단 한 분이라도 좋은 영향을 받으셨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결국 벼랑 끝에 메달려 고통을 겪은 뒤에야 벼량 끝을 향하는 탐욕의 수레바퀴에서 뛰어 내릴 테니까... 어쩌랴 그게 인간인데...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신뢰하는 어느 경제전문가의 글을 인용한다. 돈을 벌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잃지 않는 지혜를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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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현금 밖에는 추천할만한 자산이 없군요. 2013년까지는 현금>금>채권>주식 순이라 강연때마다 말씀드렸지만 이제부턴 현금밖에 없네요.부동산은 땅>전원주택>중소형 아파트>주상복합이었지만 현재는 부동산에 투자는 곱씹어보셔야할듯요.

출처: 어느 경제전문가 by tw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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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book_ Zorba the Greek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어 원제: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이 고민의 주제는 인간의 전반적인 삶을 통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묻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닌 오직 나의 내면에서 끓어오른 열정이 기본이 되어야한다. 그 열정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나의 깊은 내면을 직면해야할 필연성이 생긴다. 이는 나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초석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책은 그러한 삶의 고민의 과정에서 읽었을 때, 비로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눈에 보이는 제스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내면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를(feeling) 자각할 수 있어야만 책의 글자들이 영혼이 되어 우리의 심장에 자유를 선물해 줄 것이다. 그만큼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정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문화를 형성하고, 한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정한 일반적인 도덕 또는 규범을 알고 있어야한다. 이런 사회구조의 틀이 인간의 순수한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자유'에 대해 세상에 외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주의자' 또는 '망상가'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유'를 외친 사람만이 현재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인식하여 그것들을 버리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나의 자유를 방해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열정을 각자의 내면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그런면에서 어쩌면 자유는 목표했던 '자유'라는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정 그 차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과연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만이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물질적 자유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궁극의 자유는 정신적 자유일 것이고, 더 나아가 물질과 정신의 균형잡힌 자유일 것이다. 어쩌면 이는 육체와 정신의 자유라고 바꿔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등한시하고 정신에만 몰입하면서 삶의 균형이 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섹스는 즐겁고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왜 억압되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 안되는 것이 되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삶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깊은 고민을 얼마만큼 했으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종교가 있으신 분들에게는 어쩌면 잘 읽히지 않거나 그냥 읽힐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무언가에 얽매인 상태에서 책의 글을 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길 권하고 싶다. 얽매인 그것으로 인해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고자하는 진의가 오독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해서 저자의 이야기를 만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인간의 삶이 보이지 않을까... 영화로도 만들어졌기에 영화도 봤는데,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잘 표현했다. 그래도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다시 또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왜 고전(classic)이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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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문 중에서...]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우리는 밤이 깊도록 화덕 옆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었다.~

~성서에서 〈오늘 빛이 났도다〉라고 했더라면 사람들의 가슴은 그렇게 뛰지는 않았으리라. 그랬더라면 기독교 사상은 성스러워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세계를 정복할 리도 없었으리라. 그랬더라면 기독교의 사상은 한갓 정상적인 물리적 현상으로밖에는 기술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의 상상력(즉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죽음의 겨울에서 태어난 빛은 아기가 되고 아기는 하느님이 되면서 20세기 동안 우리들의 영혼은 그 젖줄을 빨게 되었을 터였다.~

~조르바가 나를 돌아보았다.
「…두목, 당신은 믿으시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말? 믿어서 믿는 거요, 아니면 공연히 그래 보는 거요?」
「조르바, 그건 어려운 문젠데요. 믿는다고도 할 수 없고 안 믿는다고도 할 수 없겠는걸요. 당신은 어때요?」
「나도 믿는다고는 할 수 없겠어요. 죽을 때까지 그럴 겁니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갖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나는 감동했다는 듯이 몸을 떨거나 웃어서 믿는 척했지요. 나이 들어 턱에 수염이 날 때쯤엔 그런 이야기를 무시했고 비웃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지금, 나이를 먹은 지금… 나이 먹으면 대가리가 물렁물렁해지는 걸까요, 두목. 나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믿기 시작했어요. 사람이란 참 요상한 거야!」~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 예술은 우리의 오장 육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동질한다. 필사적으로 살인과 파괴와 증오와 타락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술은 달콤한 노래로 다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다.~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 무상한 생명의 윤회,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 이 모든 사실이 다시 한 번 내 가슴을 조여 왔다. 해오라기의 울음소리와 함께 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경고였다. 생명이란 모든 사람에게 오직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여자가 사람인지 아닌지 궁금하다면서요?」
「아! 그거 풀렸어요.」 조르바는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여자도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품질이 좀 떨어질 뿐이지요. 여자란 지갑을 보면 돌아 버립니다. 착 달라붙어 자유고 뭐고, 옜다 모르겠다, 모조리 남자에게 주어 버립니다. 왜? 마음 한구석에서 지갑이 반짝거리니까요. 그러다가 정신이 돌아오면…. 에이, 이따위 이야기는 집어치웁시다.」~

~조르바는 껄껄 웃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때 조르바가 고개를 들더니 감정을 밖으로 내쏟았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그는 이런 말로 쏟아 내었다.
「두목!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부정, 부정, 부정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암, 나 조르바, 벌레 같은 놈, 굼벵이 같은 놈이지만 어림없고말고! 왜 젊은것은 죽고 늙은것들은 살아야 하나요? 왜 어린것들이 죽습니까! 아들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이름이 디미트리였지요) 나는 이걸 세 살 때 잃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이 생각만 하면 절대로, 절대로 하느님을 용서할 수 없어요, 아시겠어요? 내 죽는 날 하느님이 내 앞에 광대뼈를 내밀면, 그리고 그 작자가 진짜 하느님이라면, 부끄러운 꼴 좀 볼 거예요. 그래요. 하느님은 이 조르바, 이 굼벵이 같은 놈의 눈앞에 나타난 걸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동안 죽어 가는 여자는 베개 밑을 뒤지며 무엇인가 미친 듯이 찾고 있었다.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알았는지 여자는 트렁크에서 흰 뼈로 만든 십자가를 꺼내어 베개 밑에 넣어 두었던 모양이었다. 십자가는 오랫동안 부인이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으로 몇 년 동안이나 다 떨어진 슈미즈, 벨벳, 그리고 누더기 같은 옷가지와 함께 트렁크 밑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결정적인 병에 걸렸을 때만 듣는 약이라는 듯이, 먹고 마시며 사랑하며 재미를 볼 동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약이라는 듯이 여자는 그리스도를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

 ~「두목,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따사로운 밤공기 속에서 그윽하면서도 진지했다.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떨렸다.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받은 셈이었지만 그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모르신다!」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 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쓰여 있는 거요?」
「책에 쓰인 건 인간의 혼미(昏迷)에 관한 겁니다. 조르바, 인간의 혼미야말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있답니다.」
「인간의 혼미 좋아하시네.」 그가 실망했는지 발을 구르며 내뱉듯이 말했다. ~

~조르바의 침묵 때문에, 영원한 것이지만 필경은 역시 하릴없을 터인 질문이 다시 한 번 내 내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한 번 내 가슴은 고뇌로 가득했다.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 데서 유래하는 것은 아닐까? ~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 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얼마 후 그는 말을 계속했다.
「…부불리나가 살아 있을 동안 말입니다. 어느 카나바로도 나(뼈다귀에 가죽을 입힌 이 조르바 말입니다)만큼 그 여자를 기쁘게 해준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이 세상의 모든 카나바로는 그 여자에게 키스하면서도 자기 함대나, 왕이나, 크레타나, 훈장이나, 마누라나…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걸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늙은것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자, 유식한 양반, 이 이야기는 하고 넘어갑시다. @여자에게 그 이상의 기쁨은 없는 법입니다. 진짜 여자에게는… 잘 들어 두시오,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데… 진짜 여자는 남자에게서 얻어 내는 것보다 자기가 주는 데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리는 법입니다.」~

~「건강하시오, 두목! 행운의 신은 눈이 멀었다고들 그럽디다.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고 무작정 사람들에게 달려간다나…. 그걸 맞은 사람을 우리는 재수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에라 모르겠다, 행운이란 게 무슨 빌어먹을 놈의 것인지! 우리는 행운 같은 거 별로 바라지 않죠, 두목? 어때요?」
「바라지 않지요. 조르바, 건강하고 봅시다….」~

~「나,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어요….」 나는 조르바의 필사적인 애정에 당황하고 말았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조르바의 말이 정통으로 내 상처를 건드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은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이 잡것이!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이 병신은 그만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지.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같은 맛이 아니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

~「…두목, 주무실 시간이군요. 칸디아행 배를 잡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잘 자시오!」
「졸리지 않아요.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우리가 함께 지내는 마지막 밤이니까.」
「그러니 후딱 끝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술을 더 마시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뒤집으며 소리쳤다. 「…맺고 끊는 데가 있어야지요. 남자가 담배와 술과 노름을 끊을 때처럼. 그리스 영웅. 그러니까 팔리카리처럼 말이오.
우리 아버지가 진짜 팔리카리였습니다.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 양반이 숨만 쉬어도 날아가 버려요. 그 양반 팔꿈치에도 못 미칩니다. 우리 아버지는 사람들 입에 늘 오르내리는 고대 그리스 사람과 비슷했지요. 손을 잡으면 부서지도록 잡아 버립니다. 나는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울부짖지 않으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양반 입에서 사람 말 같은 말이 나올 때는 드물었지요.
악덕이란 악덕은 두루 갖춘 이 양반도 자를 때는 칼로 베듯이 잘라 버립니다.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이 양반은 담배를 굴뚝같이 피워 댔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밭을 갈러 들로 나갔어요. 나가서 밭둑에 기대고 일 시작하기 전에 한 대 피울 요량으로 담배를 찾는답시고 쌈지를 찾으러 혁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는데, 어럽쇼, 쌈지를 꺼내고 보니 비어 있더란 말입니다. 집에서 나오면서 담배 집어넣는 걸 깜빡 잊어버린 거지요.
 이 양반은 불같이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내달았지요. 아시겠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이성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지. 그런데 갑자기(이래서 나는 늘 사람이란 참 묘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양반은 걸음을 멈추었대요. 부끄러워진 거예요. 쌈지를 꺼내어 이로 갈가리 물어 찢고 땅바닥에 팽개친 다음 침을 팍 뱉었다나. 〈더럽다, 더러워! 이 더러운 놈의 화냥것!〉 이랬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담배를 입술에 대지 않았어요.
두목, 진짜 사내란 건 이런 게 아닐까요, 잘 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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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0

story_ Why did not write the name of the your graduating university? 왜 졸업한 대학교 이름을 적지 않으셨죠?

인성(가명)은 젊음의 열정을 모두 분출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젊기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해보는 것이 젊음이 가지는 큰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성은 구직과 관련한 지원서에서 그것들을 실천했다. 오래된 예전부터 사회는 수직적 구조에서 회사에 필요한 인원에 대한 채용공고를 내고, 채용공고를 본 구직자들이 지원서를 제출하는 구조를 유지했다. 여기서 단순히 수직적 구조의 채용이 아니라 '수평적'관점에서의 채용도 미래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성은 여러 기업들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수시채용 및 상시채용'하는 곳에 지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더 본질적인 부분에서의 혁신과 창조는 어쩌면 현재의 지원서(이력서 및 자기소개서)의 형식에서 이뤄져야지 않을까 생각한 인성은 가장 본질적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양식을 구상하게 된다. 물론, 채용공고에서 '자유양식'의 지원서를 받는 기업에 제출하는 지원서에 한해서 말이다. 이미 미래의 패러디임의 본질을 통찰했다고 생각한 몇몇 기업에 지원을 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가장 핵심은 지원서에 직무와 관련없는 개인정보는 적지 않았다. 최소한의 정보만 담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이름, 나이, 이메일주소, 연락처만 적었다. 흔히 지원서에 담았던 사진, 졸업학교 등의 정보는 담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성은 '실패를 두려워말자, 일단 지원해보고 인연이 안되면 안되는 것이니까'라고 생각하며 주변에서는 냉소적이었던 반응들을 뒤로한채 몇몇 기업들에 지원서를 보냈다. 어느 정도 사회구조상 실패를 예측하긴 했지만, 그 강도가 상당히 심하다는 것을 인성은 깨닫게 되면서 서서히 지치기도 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런 순간순간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작은 희망의 불빛들이 인성의 꺼져가는 열정에 불을 되살려 주었다. '대부분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힘든 것이구나. 그래도 한 번 밖에 없는 내 삶을 정말 소중히 살기 위해선 이런 실천이 필요하다.' 인성이 이렇게 신념을 가졌던 것은 아마도 지난 과거 스펙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통해 통찰과 지혜를 얻고자했던 인성의 노력들이 보이지 않게 인성의 가슴 속에서 작은 희망들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인성은 '자유'가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려는 삶의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성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ㅇ인성씨 전화인가요?" "예"
"저희는 oo회사 입니다. ㅇ인성씨의 지원서의 서류가 통과되어 연락드렸습니다."
인성은 기쁜 마음을 가다듬으며 덤덤한 척하려했지만, 내면에서 느껴지는 쾌감은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진정 좋은 회사(Good Company)가 한국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예민한 탓이었을까?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그 다음의 음성이 담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알아채는 순간 인성은 이 회사가 그다지 Good Company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런데 인성씨, 이력서에 '대학교 졸업'이라고만 나와있지 '대학교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서요. 어느 대학교를 졸업하셨나요?" "예, ㅇㅇ대학교 졸업했습니다."
"아예, 그럼 알겠습니다. 그럼 면접날 뵙겠습니다."

인성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아마도 이 회사는 인연이 되진 않을 것 같다. 뭐,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는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인성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인성이 예상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질문(Question) 몇개만 들어봤는데, 이 회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욱 아쉬움을 느끼게 했던 질문은 서류합격 전화를 했을 때, 인성에게 했던 질문을 또 했다는 것이었다.

"oo대학교면 서울에서 좋은 대학교일텐데, 왜 지원서류에 대학교 이름을 적지 않으셨나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인성은 대답했다. "물론 지원자가 졸업한 학교가 어느 정도 그 사람을 판단하는데, 기준이 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이야기(story)들을 적었고, 그 이야기들에 '삶의 본질'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들으시고 불러주시는 회사와 인연을 맺고 싶었습니다."

순간 면접장은 정적이 흘렀다. 인성은 면접장에서 무조건적인 '을'의 입장에서 대답해야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들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겉으로는 혁신과 창조를 외치는 수 많은 기업들에게 외치고 싶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성은 이 회사와 인연을 맺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예감했다. 그래서였을까? 면접 마지막 부분에서 회사에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라는 면접관에게 질문을 했다.

"이 회사의 경영철학은 무엇인가요?"
아쉽게도 이 회사는 인성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미 면접의 초반부에서 이 회사는 과거의 사업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때문에 지금 회사가 분주하다고 인성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두고 보더라도, '경영철학'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속가능한 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본질적 고민을 많이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인간의 삶이 100년 가까이 밖에 안 되는 삶이라해도, 그 시간 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야지 않을까? 시대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이렇게 살기를 선택한 것일까? 세상이 이상한 것인가? 내가 이상한 것인가?'... 인성은 쉽지 않은 삶의 기호들 속에서 방향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겉과 속이 다른 그 어떤 존재들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느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지 않을런지...


2014-11-19

movie_ Inception 인셉션






잠을 자다가 꾸는 꿈(dream)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한 점이 새롭기는 했지만, 뭔가 구성이 엉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꿈, 그 꿈의 꿈, 그 꿈의 꿈의 꿈... 이렇게 단계화된 꿈 속을 들어가서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좀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재는 참신하고 재미있었을지 몰라도 내용 구성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어떤 즉면에서 시나리오를 쓴 사람의 세상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강요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흔히 논리구조가 맞는다는 이유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소통을 못하는 경우처럼... 어쩌면 전문지식이 있어야만 볼 수 있는 영화라는 느낌도 받았다.

이야기의 소재는 정말 참신하고 흥미로웠지만, 구성이 조금은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영화.


2014-11-18

movie_ Moss 이끼





이 영화를 보면서 '물이 고이면 썩는다'라는 말이 생각났었다. 무엇이든 고착되어 변화를 거부하기 시작하면, 서서히 부패한다는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에. 고인 물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이 영화가 슬쩍 알려주는 듯하다. '인간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 그 물음 중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해 주목하게 하는 영화.

극 중 상반된 신념이 크게 부각된다. 간단히 말하면, 선과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친 순결주의를 주창하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파하려던 유목형(허준호)의 생각이 본인에게는 통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했던 건 아닐까... 각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한 사람이 생각하는 삶의 양식에 맞추려다 보니 생겨나게 된 복잡함... 
지나친 우상화가 가져오는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영화에서는 인간에게 내재된 '본성'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있게 본 영화다.



2014-11-16

think_ the Idealist is the Realist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자다.

현재 우리는 "빠름"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빠름"의 문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고 생각(think)할 시간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쩌면 인간이 다른 생물과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은 생각(think)한다는 것일텐데, 언제부턴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더 안타까운 건 생각할 여유가 있는 분들께서 그다지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은 상당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생각하는(thinking) 습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들이 많은 것 같다. 상상일 수도, 망상일 수도 있는 생각의 주제들에 대해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주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다. "원래 세상은 그런거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무시해버리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상당히 고민하는 시간은 길어졌고, 그 고민의 깊이 또한 깊어졌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 직면해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인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 아닌 경우에는 쉽게 기억에서 사라지나보다. 그냥 현재 사회의 틀(frame)을 깨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안주하는 경우들을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떤 추상적인 실체를 대중화하기 위해서는 개념화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한 단어(word)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라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주의자가 설정한 목표(target)로 인해 이상주의자는 비로소 현실주의자(現實主義者)가 된다. 비록, 그 목표가 허황된 목표일지라도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이상도 없이 주어진 사회시스템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능을 포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설정한 삶의 목표, 그리고 그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내가 직면하고 뛰어 넘어야할 고난들... 그냥 편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인문학 체력 덕분인지 그냥 살고싶지는 않았다. 미래에 어떤 열매를 맺게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이 따뜻하게 요동치는 삶이 살고 싶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 다짐들을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허나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깨닫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쉽다. 하지만 잡초와 돌덩이가 무성한 곳을 길로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강한 신념을 필요로 한다. 내 열정이 향하는 목표가 제대로된 목표인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고민하여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는 치열한 고민도 필요하다. 여전히 고민의 연속이고, 여전히 고독감 속에서 직면하는 것들은 익숙하지 않아 불안감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들에 대한 생동감이 한 인간의 굳어져 있던 심장에 온기를 선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은 다름(difference)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이 하는 방법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차이'를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다름(difference)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마치 "지식이 있는 사람은 절대 지혜를 얻을 수 없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은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현실주의자(Realist)라는 말보다는 이상주의자(Idealist)가 여전히 듣기에 좋다. 남은 뭐라할지 모르지만, 이상주의자라는 말에는 현실주의자가 온전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단, 이상주의자가 그 이상을 실현해내기 위해 실천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필요할 것임은 당연하다.

2014-10-29

Contraception 피임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 참고만 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만, 사랑하는 연인이 남성과 여성인 경우 그리고 임신(pregnant)을 염두에 두지 않은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쾌락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란 측면에서 긍정될 수 있지만,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 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남녀가 섹스를 나누는 쾌락의 자유 뒤에는 '새로운 생명'이라는 책임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그렇다고 인간의 성적욕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억제하려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보인다. 어쩌면 임신은 신의 영역일 수도 있지만, 임신을 원하지 않는 섹스의 경우에는 인간으로서 해야할 기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치 않는 임신이 된 경우,
섹스하기 전 충분히 피임(contraception)을 했을 경우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에만 몰입한 경우에는 상당히 다른 반응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지 않을런지... 더군다나 원하지 않은 임신의 경우에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부정적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때문에 이상적인 관점에서 남성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피임(contraception)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테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이 스스로 피임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피임(contraception)에 대해 필수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청소년들이 이른 나이에 섹스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이 글의 본질은 아니다. 다만, 청소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섹스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인간이다 보니 실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필연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에서 청소년들이 피임(contraception)하는 방법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할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피임 방법에 대해.
피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기에 여기서 소개하는 방법들은 참고만 하시면 될 것 같다. 참고로 소개하는 내용은 과거에 '구성애의 아우성'에서 알게된 것들임을 밝힌다. 어떤 남자 분들의 경우에 '체외사정'으로 피임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개인적인 생각에 조금은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상대방 여성분을 진정 배려하고 있는지, 진정 사랑하는지 묻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체외사정'이 피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미 사정하기 전에 나오는 쿠퍼액에도 정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피임은 아마도 '콘돔(condom)'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섹스를 하기 전 콘돔(condom)을 준비하는 것에는 상당히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방 여성을 진정 사랑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상대방 여성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하는지를 알려주는 척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게다가 남성이라면 본능적으로 느끼는 성적충동에너지를 상대방 여성을 위한 '존중'과 '배려'로 승화 시켰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일 수 있다.

"여성은 365일이 가임기이다."
물론 가임기를 벗어난 기간은 임신이 될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여성의 몸은 1년 365일 전체가 임신이 가능하다는 구성애씨의 조언은 남성이 상대방 여성이 가임기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콘돔(condom)을 준비해야함을 알려주는 것 같다. 특히나 여성의 가임기를 계산하는 방법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참고로 *생리주기가 규칙적인 여성의 경우에 계산이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 보통 한달에 한 번씩하는 생리를 아예 안하거나 한 달에 2번하는 것 처럼 불규칙할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생리주기를 이용한 피임이 불확실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의 생리주기: 생리시작일~ 다음생리시작일(30일로 가정)
배란 예정일: 예정 생리 날짜에서 14일(2주) 전(before)
가임기간: "-5" ~[배란일]~ "+3" / 생리예정일에서 "-19일"과 "-11"일 사이
구체적 예: 생리시작일이 10/29일인 경우
              다음 생리 예정일(생리주기 30일 가정): 11/28일 (참고: 10월은 31일까지 있음)
              배란예정일: 11/14일 (11/28일 빼기 14일)
              가임기간: 11/9일-11/17일


이렇듯 '가임기간'에는  사랑을 나눌 때, 상당한 주의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임신을 계획한 섹스가 아닌 경우에).

섹스는 인간에게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긍정적인 감각이다. 다만, 여기에는 (임신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가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준비를 했는데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면 매우 희망적인 신의 뜻일 수도 있고...

결론, 섹스(sex)는 즐거움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