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fiction_ 내 재능과 경험에 대한 비평과 발산(2)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은 내가 삶을 보는 관점을 바뀌게 했다. 내일이 내게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오늘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해줬다. 과거에 나에게 닥친 어둠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가슴 속에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어떻게든 그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때의 경험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음을 느끼게 됐다. 나의 경험 속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휴식을 취해야 할 때 과감히 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고민 덕분에 반복적으로 만나는 가족들이 과거엔 당연한 존재들로 여겨졌지만, 언제부턴가 가족 중 어느 누군가의 부재에 대해 고민하면서 가족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매 순간에서 삶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 고등학교 적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밤늦게 친구가 있는 병원에 달려갔을 때와 약60년의 삶을 사시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이모부의 시신을 장례식장의 안치실에서 직접 내 눈으로 바라봤을 때의 그 느낌들은 나에게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에 대한 소중함과 간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 일련의 경험이 죽음(death)이라는 것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었고, 현재도 그 고민은 지속되고 있다. 나의 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껴서일까? 나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저녁에 하루를 마감하며 일기를 쓸 때는 그래도 내가 오늘 하루 보람차게 살았음을 기록하며 마음이 충만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이 라면박스 한 개 정도에 가득 들어갈 정도이며, 내 인생에서 큰 장애물이 있었던 지난 4-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장에 그날의 경험과 생각을 적으며 나 자신에 직면했던 기록이 여전히 일기장에 남아있다. 나는 원래 글짓기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긴 시간동안 일기를 써오면서 조금씩 글 쓰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는 것을 느꼈고,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현재는 블로그나 SNS를 통해 내 생각이나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 등을 글로 표현하면서 지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 쓰는 연습을 더해서 앞으로 내 피와 땀으로 써낸 책을 출판하고 싶은 게 소망이다. 나의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싶은 충동을 일기를 쓸 때 마다 나도 모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국토대장정에 참여했다. 국토대장정은 대구유니버시아드경기장에서 고성통일전망대까지 약600km를 20박21일 동안 약140명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144명의 사람들이 12명씩(남자6명/여자6명) 한 조를 이루어 같이 걸었다. 여러 사람과 모험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나의 남는 에너지를 주위사람들에게 전달해주면서 같이 힘을 내어 걷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들 중에서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형들의 시선에서는 나대는 녀석으로 눈 밖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6명의 남자 중 내가 가장 건강한 상태로 잘 걸었다. 처음엔 혼자서 건강히 잘 걷는 내 모습에 흡족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낙오하는 조원들을 보면서 ‘내가 건강한 건 나머지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쓰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조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던 실수가 여전히 지금도 생각난다. 그 당시 내가 막내였고, 어떻게 손쓸 방법들이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속한 조를 위해 더 최선을 다했어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나보다 체격도 건장한 형이 계속 낙오를 하면서 본대에서 쳐지는 것이었다. 그 형은 눈물을 흘리면서 본대를 따라 오기위해 애썼다. 나를 포함한 우리 조는 본인들도 걷기 힘든 상황에서 그 형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걷는 데만 열중했다. 급기야 그 형은 대장정이 중반에 들어설 때 조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장정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난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남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그 형을 다독이며 “니가 그만두면 우리 조원들도 모두 그만 둔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완주하길 응원했다. 결국 포기를 하려던 그 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장정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가 그때 본대와 떨어져서라도 그 형과 같이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그 형이 내게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대장정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서 본부에서 담화형식으로 ‘힘들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걷느라 발바닥이 물집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 형은 옆에 있는 나에게 “나 좀 업어서 2층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어?”라고 부탁을 했다. 난 형의 말을 듣고 형을 업고 2층까지 업어다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즐겁지만 않은 것이 형을 도와주면서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나의 실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형은 정말 힘들어서 내게 도움을 청한 건데, 나는 그런 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무런 감정적 교감도 없이 단순히 형을 업어서 2층까지 데려다 준 것 밖에 없는 것이었다. 진정 아픔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를 그 때의 경험을 통해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직접 아픔의 시간을 겪으면서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 더욱 고민하기도 했다. 대장정을 하면서 사람은 안정되어있을 때 그 사람의 본질이 보이는 게 아니라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나온다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위기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 조금만 힘을 내어 조원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모든 조원들이 더 힘차게 한발 한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각기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20박21일이라는 짧거나 길수도 있는 시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혼자서 600km를 걷는 건 매우 힘들지만, 같이 손잡고 걷는 것은 덜 힘들다는 것도 배웠다. 이렇게 대장정에서 배운 지혜를 통해 여러 사람과 함께 할 때 타인을 배려하는 것과 동시에 공동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조금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결국 삶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타자가 있기 때문에 나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삶 속에서 나의 자존을 지켜내면서도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더욱 발전되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여러 경험과 재능 덕분에 여러 사람을 이해하는 포용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비판 받을만한 상황일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 비판에 앞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다보니 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중간 역할을 잘 하는 것 같다. 또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도시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연결자(connector)의 역할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험의 폭을 세계무대로 넓혀 동서양의 서로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외국어, 특히 영어 실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영어능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열심히 배워둔 기본 수준의 일본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영어와 일본어를 포괄하여 함께 공부할 예정이다. 즉, 외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해야할 당위성을 깨달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내 앞에 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해야할 당위성은 이미 내게 주어진 것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을 타고 나의 자유를 지켜내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긍정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그런 인재로서 내 삶을 살고 싶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나가고 공정한 무대에서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조금이나마 내가 도움이 되고 싶다.



(끝)


fiction_ 내 재능과 경험에 대한 비평과 발산(1)

삶의 단편적인 흐름만을 본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삶의 단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이 보고 싶었다. 아마도 이런 생각들은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나의 무의식에서 발현된 삶에 대한 필연적 고민이었던 것 같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장면들을 나는 가급적 느리게 보고 싶었고, 그 장면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싶었다. 특히나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진지함’에 대한 강도는 더 깊어졌지만, ‘대학에 가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며 고민하자.’며 고등학생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학업에 충실했다. 그 와중에도 논어를 조금씩 공부하면서 철학을 통해 ‘진지함’에 대한 습관을 꾸준히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선생님께서 혼자 뭔가를 생각하는 나의 모습 때문인지 ‘0도사’라는 별명을 지어주시기도 했다. 드디어 내가 바라던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잠시 쉬고 있었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 간절히 바라던 그런 삶이 쉽진 않았다. 대학에 들어오니 또 다시 취업 준비라는 끝도 없는 채찍질 속에서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대학생활과 취직준비를 하면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속에서 허둥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때도 어김없이 삶에 대한 고민은 조금씩이라도 계속 했다. 그러다 한계점에 다다랐다. 취업준비와 삶에 대한 성찰을 모두하기엔 내 힘에 벅찼던 것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앞만 보며 치열하게 달려온 내 삶에 휴식이 필요했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에 대한 가치관과 지나온 삶에서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진지함 없이 그냥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지인들과 대화를 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내가 느끼는 소외감이 긍정적인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깊게 고민할 필요를 느꼈다. 나의 ‘진지함’이 긍정적이라면 더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긍정적이지 못하다면 수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취업은 좀 늦어져도 된다. 하지만 20대에 꼭 해야 할 삶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삶을 더욱 ‘진지함’으로 직면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면서 그 동안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삶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내 나름의 가치관까지 가질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 ‘진지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진지함에서도 어김없이 균형(balance)이 필요했다. 파편화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흐트러지게 놔두는 게 아니라 그 생각들을 알맞게 묶어주는 노력이 필요함을 고민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지인에게 나의 단점에 대해 물으니 “생각이 많아서 그에 따라 행동이 느리다”라고 대답해 주었기에 고민을 하면서도 직관과 통찰을 통한 빠른 판단력과 행동력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즉,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 생각이 더욱 깊어지고 체계화되기 위한 또 다른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예술, 철학, 역사, 인문, 사회, 과학 등등의 학문에까지 관심 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특히나 평소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나는 어떤 정보를 취하고 버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오다 어느 날 어느 강연장의 연사가 한 말에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든지 통찰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특히 예술에 관심을 가져라”라는 강연자의 말에 그 때부터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던 나는 차분히 예술(Art)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서양미술사와 동양 미술사로 대표되는 중국미술사에 대해 공부하고 틈틈이 여러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작품을 만드신 작가님 몇 분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품에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여전히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는 서용선 작가의 <자화상>과 위에민쥔(중국 작가)의 작품들이다. 또한 고전음악인 서양의 클래식과 우리의 음악인 판소리를 들으며 내가 듣고 있는 소리에서 느껴지는 것들도 살펴보았다. 특히나 클래식을 듣다가 하루는 어느 드라마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이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내 마음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고, ‘이래서 예술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던 것이 구나!’라는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내가 괜찮게 본 작품들은 SNS를 통해 지인들에게 추천하면서 예술을 통해 내가 느끼고 배웠던 것들을 공유하려는 노력도 같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술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도 끊임없이 예술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있다.

철학(Philosophy)은 과거에 단어 자체만으로도 내게 위압감을 주었던 학문이었다. 하지만 동서양의 철학입문서를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파편화된 생각들을 어떻게 조합하여 그 생각을 응집할 수 있는지를 철학이 내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지금껏 내가 배운 여러 학문 중 단연 철학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국가와의 관계, 나와 세계와의 관계, 더 나아가 나와 우주와의 관계에서의 고민 등 그 동안 질서 없이 고민만 하던 내게 철학이 준 선물은 정말 값진 것이었기에 철학을 두려워하는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철학 공부를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철학적 고민들 덕분에 가까운 지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작은 힘을 주기도 했다. 지인 중 지나친 경쟁위주의 환경에서 자신들 돌보지 못하고 바쁘게만 살던 분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 나도 모르게 커터 칼로 내 손목을 슬슬 긁어 봐요”라는 말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그 지인의 마음이 상당히 지쳐있고, 삶에 대한 긍정성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때부터 2-3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지인을 만나 이야기도하고, 지인이 배우고 있는 회계원리를 카페에서 가르쳐주면서 서로의 마음이 손을 잡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뒤 그 지인의 부모님께서 내게 “너를 만난 뒤로 00가 많이 밝아졌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즐거운 감정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이런 경험 또한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느린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진지함’이 내게는 큰 재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철학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한 나의 고민이 더욱 깊어 질 수 있었고, 실제 삶에서의 실행을 통해 내가 내 삶에서 주체적으로 살고 있음을 느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기고 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일 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서 안주하는 것으론 안 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삶에 대한 성찰과 깊은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History)에 관심을 가졌던 계기는 나의 역사를 살피면서 시작되었다. 내 부모님이 살아온 삶의 궤적, 내 부모님의 부모님이 살아온 역사적 배경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1900년대 초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 동안에 우리 민족의 영혼이 처참히 찢겨지는 비극을 겪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역사적 환경을 이해하면서 부모님을 이해하게 되었고, 부모님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우리의 선조들의 영혼에 깊게 고개가 숙여지기도 했다. 단순히 문제만 맞추기 위해 국사공부를 열심히 했던 나의 학창 시절이 부끄럽게 느껴졌던 때였다. 그 경험 덕분에 역사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더욱이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내 가치관에 입각하여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야만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온전히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사에도 관심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현재는 전반적인 숲을 보는 수준에 와있을 뿐이며, 앞으로 다각적인 부분에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결국 역사라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을 하고나니 ‘진지함’은 삶을 사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쌍용차의 회계조작 의혹과 같은 사건이 이런 ‘진지함’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 쌍용차를 회계감사(audit)하면서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했다면 사람들이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사를 했던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하지 못한 것 같다. ‘나의 결정과 판단으로 인해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긍정적 삶을 사는 것’을 자신의 삶의 가치관으로 삼았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밝아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지함’을 통해 예술, 철학,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의 학문에 관심을 가졌고, 부모님의 삶과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됐다. 그런 과정을 통해 통찰력과 직관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과정이라면 나의 재능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타인과의 차이가 아닌 다름(difference)을 추구하는 나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문으로서 회계학과 관련된 배경지식이 있다. 기업의 재무상태를 보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절차와 용어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업의 기본적인 재무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회계(Accounting)와 세법(Tax)의 기본적인 체계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세무 관련된 기초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재능을 실제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소액으로 주식투자를 경험하면서 기업의 재무상태표를 읽어내는 훈련을 했고, 경제신문을 보면서 학문으로서의 경제적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또한 과거에 경제적 지식이 없어서 돈을 안전하게 보호하지 못하셨던 부모님께 기본적인 경제 지식을 이야기해드리면서 나 또한 실생활에서 필요한 경제 지식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실물경제를 공부하면서 회계 및 경제지식을 더욱 진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경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다른 학문과 연관되는 희한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단순히 경제관련 지식만 있다고 해서 시대의 경제적 흐름을 읽고 투자에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투자에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본질적으로 인문학(humanities)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경제라는 게 수학적으로 정규분포를 이루는 게 대부분일 수 있지만, 결국 큰 사건은 정규분포에 의한 예측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경험 덕분에 경제뿐만 아니라 앞에서도 말한 예술, 철학,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의 학문에 까지도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의 자존과 자유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경제에 대한 공부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현재는 ‘화폐와 금융’과 관련해서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있으며, 영어 공부도 더욱 열심해서 해외의 영문경제 기사도 원활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영화_ 찌라시: 위험한 소문





사실Fact와 진실은 다를 수도 있다.

어느 남자가 카페에서 여인을 만나고 있는 그 장면은 사실Fact이다. 하지만 그 사실fact에 약간의 살을 붙여 '서로 연인관계이다'라고 말한다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두 남녀는 단순히 일때문에 만난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증명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어느 누군가가 이 부분을 수정하게 되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본질이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비밀이 진실을 이기는 순간 우리는..."이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몇년 전부터 내 귀에 자주 들렸던 단어는 "수평적네트워크"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은 수직적네트워크였고, 내가 먼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식의 치열한 경쟁위주의 패러다임에서 이제는 '나 혼자의 천 걸음이 아니라, 천 명이 서로 손을 잡고 내딛는 한 걸음'이 더욱 중요해진 패러다임의 시대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다른 요인들 중에서도 IT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과거 TIME지의 표지에는 컴퓨터 모니터에 "YOU"라는 글자가 덩그러니 쓰여있던 적이있었다. 상당히 고민을 한 뒤에야 '나도 세계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깨달았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 극중 김강우씨의 손가락을 하나씩 뒤로 꺾는 장면이 있다.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온 건 아니었지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반복적인 자극 덕문이었을까? 손가락을 못쓰게 하려는 그 장면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는지, 영화 말미에서 드러남을 느꼈다. 급기야 김강우씨는 마지막에 모든 손가락이 뒤로 꺾이는 상황에 놓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 모든 손가락을 꺾을 수는 있겠지만, 꺾지 못하는 게 있다"라고...어쩌면 그 꺾지 못하는 큰 힘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한다. 흩어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흩어져있는 그 힘들이 한 곳에 모여 견고히 뭉치게 되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거대한 힘이 되는 것이다. 마치 아주 작은 희망이 모여 큰 희망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오늘 1페이지를 읽으면 언젠가는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이 올것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 한다면 마지막 장을 넘기며 느끼는 희열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영화의 제목을 보고 눈이 이끌렸고, 예고편을 본 뒤 왠지모르게 이 영화는 꼭 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본 영화였는데, 개인적으로 괜찮게 본 영화였다. 영화 중간중간에 코믹적인 부분도 적절히 넣어놔서 잘못하면 불안에 떨며 볼 수도 있을 영화를 조금은 온순하게 만들어 마음 졸이지 않고 조금은 편하게 볼 수 있었다.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4)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전부를 다 줄 수 있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지금은 자본주의가 사랑의 영역을 심각한 속도로 갉아 먹고 있기 때문에 사랑에서의 ‘진정성’이 매우 중요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돈보다 더 중요한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trust)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해야 한다는 내 나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 안정이 돼야 사랑도 한다.’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본주의시스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부분이 충족이 되어야만 사랑의 진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안정만으론 부족한 것 같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에 대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넉넉해도 사랑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내가 가진 경제적 넉넉함이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떤 선물을 할 때, 어떤 선물과도 비교되지 않는 선물은 뭘까?’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다. 결국 이 물음 속에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선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내 전부를 다 줄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이면 내가 이 삶을 마감하는 그 날에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전부를 다 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조금씩 변하려는 노력이 어느 순간 쌓이면 큰 혁신으로 내 삶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진정한 사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 여인을 위해 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것’ 돈보다 더 중요한 나의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로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나는 내 삶에서 크나큰 성공을 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진정한 사랑을 갉아 먹고 있는 지금, 사회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심성에 들어가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진정성을 담아 내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회시스템이 두 남녀의 사랑에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간섭하고 방해하는지의 본질을 보려는 노력을 통해 나의 사랑이 유지될 수 있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사랑에 대한 자본주의의 간섭뿐만 아니라, 가부장적인 우리나라의 문화도 상당부분 진정한 사랑을 하는데, 방해요소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항상 조연이 아닌 주연이어야 한다. 서로 연애할 때는 서로 관계된 사람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주연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문화에서 혼인을 하게 되면 두 남녀가 어느 순간 주연에서 조연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주인공이 되게 노력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은혜만 헤아릴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부모님 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앞서 말한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대부분 내가 사랑하는 사람 편에 설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선 혼인하기 전에는 부모님을 더욱 생각하고, 혼인을 하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면 된다는 생각을 하며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연애와 혼인은 다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연애와 혼인이 같다’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왜 연애와 혼인이 달라야 하는가? 내가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을 연애할 사람, 혼인할 사람으로 구분지어 놓고 한 번 밖에 없는 내 삶을 ‘이것은 연애’, ‘이것은 혼인’이라 구분 지으며 진정성 없이 살아가야 할까? 연애와 혼인으로 개념화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진실 되게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떨어져있는 게 너무 싫어서 혼인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이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새로운 생명을 이 세상에 탄생하게 되고 나에게 이런 아름다운 여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아내의 부모님에게 감사하게 되고,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내 부모님께 감사하게 되고……. 하는 이런 삶의 흐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그리고 사랑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더욱 진정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생각하고 서로 소통하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다. 그 소통의 연장선에서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았다. 특히나 청춘의 열정이 타오르던 젊은 시절에 심각히 고민한 주제가 있었다. 바로 성욕(sexual desire)에 대한 것이었다. 단순히 사회 도덕적 규범에 의해 내 행동이 규제되는 것보다는 왜 그런 도덕적 삶이 요구되는지의 맥락을 읽을 필요가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사회가 금기시 하는 것에 대해선 더욱 욕망이 타오르기 때문에 성욕을 억제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왜(why)?라는 물음을 통해 전체적인 숲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몸에 대해 공부했고, 지금은 <세계풍속사>라는 책을 읽으며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고 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내 전부를 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과 작은 실천들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고 실천할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사랑이라는 극적인 상황만을 설정하기 보다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겪는 사랑의 진정성부터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은 내가 목숨을 걸 정도로 큰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닌 것 같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날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겪게 되는 그 삶에서 내 사랑의 진정성을 실천하는 삶의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큰 것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금 작지만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내 삶에서 실천할 것이다. 많이 들었던 고사성어지만 그것이 중요한 걸 깨닫고 실천하는 가정이 많지는 않다보니 사회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미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그 사람 인생의 출발선이 달라지는 것 같다. 그만큼 인간에게 환경은 매우 중요하게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직간접적으로 내가 경험해본 결과 상당히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좋은 학벌과 좋은 직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 바탕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의 어릴 적 무의식(unconscious) 속에 남아있는 마음의 상처들을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치유하여 나의 자녀에게는 그 아픔이 대를 이어 전달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내 부모님의 역사를 이해하고 사회가 규정지은 효(孝)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역사와 철학적 맥락을 살펴 그 맹점을 발견하고 내가 생각하는 효(孝)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이미 과거에 이런 과정을 내 나름의 노력으로 실천하면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좁은 범위지만 가까운 지인들에게 내가 깨달은 것들에 대해 알리면서 서로 소통하려고 노력중이다. 내가 내 삶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자유로는 부족한 것 같다. 나의 근본을 이루는 가정이라는 곳이 어느 정도 튼튼한 바탕이 이뤄지지 않아 있다면, 내가 사회적 기준에서 성공한다한들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나의 상황에 주어진 과제가 무언지 찾아내고 그것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거친 뒤에라야 나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 같다. 그 중 ‘가정의 행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삶의 고민일 확률이 많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이제부터 나의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과제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날 내가 고뇌했던 경험들은 앞으로 나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힘찬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내 삶이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향할 수 있게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끝)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3)

내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도 여전히 필요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에 그 불행(unhappiness)이라는 위기 속에서 어떤 판단을 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fate)이라는 것이 정해지는 것 같다. 불교에선 그런 불행에 대해 업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보다 뭔가 본질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나의 삶에도 이런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행은 이미 내게 닥친 것이며 가급적 빨리 그 불행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나아지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나의 삶에서 ‘떳떳함’이 중요하게 필요하다는 자각을 했다. 내가 살아온 삶에 떳떳하며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 내게 닥친 불행은 내가 더 강해지기 위한 좋은 기회라는 관점이 생기게 되었다. 즉, 그것은 내게 불행이 아닌 것이고 내가 기꺼이 팔을 걷어 부치고 맞서야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의 과정을 통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생각에만 그친 게 아니라 이미 삶에서도 여러 번 경험한 기억이있어서 더 이상 관념화하기 보다는 실제 삶 속에 체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 있어야 그런 삶의 태도가 지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내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바른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자’라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바른 삶’에 대해 나름 간략히 정의를 내려 보면, 나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타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는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다. 상처를 받은 타인은 또 다른 타인에게 그 상처를 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내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간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몸소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꼈다. 단순히 타인의 행동에 먼저 비판부터 하는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내가 살아온 삶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다가는 오판하기 쉽고 타인을 공감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삶 또한 존중하며 넓게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을 기를 것이다. 이렇게 내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함께 나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왔는지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상황은 불행하게도 내 인생에 상당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낙담하고 실패의 길로 들어서는 건 인생을 대하는 참된 자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나의 노력으로 지금 내가 직면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내 뒤에 태어날 미래의 후손들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삶의 어둠을 뚫고 서서히 따뜻한 태양 빛을 맞이하는 느낌을 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진일보하는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money)에 대해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나의 자존을 지켜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고, 내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과연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단순이 ‘많을수록 좋다’는 이미 나의 영혼이 자본주의시스템에서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해버린 안타까운 경우일 것이기에 자본주의시스템에서 주체성을 지켜내며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할 계획이다. 그리고 ‘돈을 쓸 때는 부자의 마음이 아니라, 가난한 빈자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써야 탈이 없다’라는 말에서 상당한 공감을 받았다. 돈이 많음을 과시하는 부자의 마음이 아니라, 빈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통해 인본이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인 독립은 나의 자유를 지켜내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대한 부모님과 타인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나의 힘으로 경제적 독립을 함으로써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돈(money)보다 시간(TIME)이 더 중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 중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와 ‘타인과의 차이가 아닌 다름difference을 추구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지금 그리고 미래의 변화 속도는 지금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만을 찾으려는 태도보다는 ‘불안정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항상 배우는 자세를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 중 ‘다름difference’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에 앞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더욱 빨라질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만 해낼 수 있는 영역’을 많이 확보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과는 다른 관점을 지니고, 타인과는 다른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전반적인 나의 노력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쓴 논술의 내용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의(justice)에 대한 고민을 통해 사회에서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지금의 사회는 너무 빠르게만 진행되다보니, 상당히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삶이 너무 빠른 나머지, 자신이 하는 생각과 행동들의 옮고 그름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거의 없게 되고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하는 관습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환경에 살면서도 정의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다 어느 순간 그 고민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해야겠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어느 날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관련해서 어렵게 조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에게 듣기 싫은 조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내 조언에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에 입각한 어떠한 근거도 대지 않고, 조언하는 나를 ‘이상주의자’라며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친구뿐만 아니라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행동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안 뒤에 나는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 더욱이 친구를 포함하여 그들은 사회에서 뭔가를 성취한 사람들이었기에 그 충격의 강도가 상당히 심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회적 기준에서 내가 이뤄낸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의 근본을 이루는 삶의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근본이 흐트러져 있게 되면 사회적 기준에서 이뤄 낸 그 모든 것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실제로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계속......)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2)

역사(history)를 통해서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혜안을 배울 수 있는 것 같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공부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현재 우리의 삶과 견주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역사적 교훈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한국사의 경우 현대사를 먼저 공부하면서 역사공부에 재미를 붙일 필요가 있다. 1900년대 초를 시작으로 우리는 일제강점기라는 힘든 시간을 보내왔고, 그 시간들로 인해 지금까지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상당한 상처를 입은 채 다양한 문제들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 역사들을 깊게 공부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앞으로 내게 주어지는 삶의 장애물들을 현명하게 풀어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역사는 곧 미래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됨으로써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나의 관점을 의견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공부하고 알아낸 역사를 바탕으로 인식한 내 의식을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안들에 대해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배짱을 기르고 싶다. 그리고 그 배짱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행동에 옮기고 싶다. 타인의 관점이 아닌 오직 나의 관점과 의식의 표현이 내 자존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science)은 인류의 역사가 발전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 학문이다. 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 시켰고, IT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에 편리함과 빠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평소 몸(body)과 마음(mind)의 건강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의 몸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다. 그리하여 지난 시간동안 일반적인 의학 관련 서적들을 통해 현재 자본주의 속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의학 분야의 맹점들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나의 건강과 내 주위에 있는 지인들의 건강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또한 나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전문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대표적으로 동양의 한의학이나 서양의 양방의학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을 쌓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내가 어느 정도 믿고 있는 의학 관련 지식은 ‘어제 먹은 음식이 오늘 내 몸을 이루고, 오늘 먹은 음식이 내일의 내 몸을 이룬다.’라는 말처럼 우리가 먹는 음식(food)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현재는 생협(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통해 대부분의 식료품을 구매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와 농촌이 상생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것이 맞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을 제대로 먹어서 병원에 가지 않을 정도로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몸이 병들게 되면 아무리 높은 명성과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쓸모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봐온 사람들은 몸이 아프고 나서야 음식의 중요함에 대해 깨닫는 것 같다. 이런 악순환을 끊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다. 

또한 과학의 발전 중 IT의 발전이 인간 삶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더라도 IT에 대해 배우는 것은 필수요소라는 것을 지난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개인용PC가 개발되면서 인간의 삶에 혁신을 가져다주었고, 이제는 스마트폰이라는 기기를 통해 인간의 손에 개인용PC가 휴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또 다른 혁신을 준비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IT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더라도 IT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현재 크게 대두되고 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클라우드컴퓨팅 등의 배경지식에 대해 더 많이 알아둘 계획이다. 이런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것들을 탄생시켜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ios와 안드로이드운영체제를 사용하는 IT기기를 사용하면서 각 운영체제의 장단점에 대해 나름 경험을 해본 기억이있지만, 그보다 좀 더 깊이 있는 경험과 학습이 이뤄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인간의 삶에 스마트폰과 같은 IT기기들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IT에 대해선 거의 몰랐던 게 사실이었지만, 예전에 지인이 쓰던 아이팟(iPod)의 와이파이 기능을 이용해 이동하면서도 뉴스를 볼 수 있었던 그 경험 덕분에 IT의 중요성을 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머지않아 애플의 siri 또는 IBM의 watson 같은 비서를 내 손안에 있는 스마트폰에 한 명씩 데리고 다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종교(religion)는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종교는 없지만,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다. 종교가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를 살펴보고, 각 종교가 우리 삶에 말하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를 탐구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한 결과 종교는 신뢰(trust)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현재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관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더 크게 종교가 우리 삶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절대 배신하지 않는 신을 설정해 둠으로써 무형의 어떤 존재를 믿으며, 현재의 불안정에 대한 안정을 고민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종교에서 말하는 삶의 공통 지표 중 한 가지는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설령 신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사후 어떤 신 앞에서 심판을 받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종교는 인간의 마음 바탕을 이룰 수도 있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있는)타인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종교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종교도 인간 각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리(cooking)를 하면서 삶을 성찰한다. 많은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자취를 하면서 내가 직접 장을 봐서 사온 식재료를 이용하여 몇 가지 음식을 해 먹는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먹는 음식(food)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의식주 중에서 식(食)의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음식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을 때의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다는 걸 이미 느껴봤기 때문에 앞으로 도전해보지 못한 음식들을 만드는데,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한 행복한 삶을 누리고자 노력할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앞으로 내가 배울 것들을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과거에 본인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기에 가능했다. 개인적으로 극심한 고독의 시간에서 나와 대면하는 그 과정을 통해 20대에 꼭 고민(agonize)해야 했던 주제들을 고민한 덕분이었다. 바쁘게 흘러가는 사회 속에서 취업을 잠시 뒤로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의 이정표를 설정하는 과정 속에서 고민의 시간이 너무나 중요했다는 걸 알기에 앞으로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깊게 고민(agonize)할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누적되다보면 좀 더 폭넓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써 답을 찾는 것뿐만 아니라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부터는 과거 내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 자취들에 대해서 풀어낼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앞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유지할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분류하자면 먼저 나 개인으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서술한 뒤, 나와 타인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의 삶의 태도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먼저, 휴식(rest)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과감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기 위해 현재도 고민하면서 실천하려고 노력중이다. 뭔가 성취해내기 위해 앞으로 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님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취를 위해 달려가는 것과 중간에 적절한 시점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에서의 균형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이 먼 여정이기 때문에 그 여정에서 지속적으로 나의 삶이 풍요롭기 위해서는 ‘휴식’이 정말 중요하고 생각한다. 특히 휴식에서 운동(exercise)과 명상(meditation)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운동을 통해 내 몸을 건강하게하고, 명상을 통해 내 마음을 튼튼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과 명상은 예전부터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습관으로 자리 잡혀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접해보지 못한 운동들을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새로움에 대한 내성을 기르고 내 몸도 튼튼히 할 생각이며, 명상의 경우는 아침기상 후 또는 저녁 잠자기 전에 내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꾸준히 보낼 것이며 특히 인간의 무의식(unconscious)에 대해 더 공부할 예정이다. 또한 운동의 경우는 나 혼자가 아니라 지인들과 함께 즐김과 동시에 내가 잘하는 야구 및 달리기 등과 같은 운동은 내가 지인에게 가르쳐주고 또 내가 모르는 운동은 배울 수 있는 시간도 가질 것이다. 예전에 지인과 같이 조깅을 하면서 내가 지인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줬던 적이 있는데, 지인이 상당히 즐겁게 운동을 했다며 내게 칭찬을 해줬던 적이 있었다. 이렇듯 혼자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운동을 앞으로 더욱 많이 할 계획이다. 단순히 경쟁으로서의 운동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고 협동하는 삶의 태도를 위한 내 나름의 삶에서의 실천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에 깨어있는 삶’을 살기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자연의 순리대로 늙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내일 내가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자각은 하루의 삶이 너무나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에 이런 삶의 태도는 삶의 본질을 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그런 삶의 태도가 조금씩 누적되어 큰 혁신(innovation)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내 나름의 가치관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하루를 마감하며 일기(diary)를 쓰고 있는데, 일기를 쓰면서 이런 삶의 이치를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루 한 페이지씩의 글을 쓰다보면 어느 순간 일기장의 마지막장을 넘기게 되는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작은 것들이 누적되어 큰 것을 이루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현재에 깨어있기 위해선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며,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노력’이라는 것에 대해 심각히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과연 어떻게 노력하는 게 최선을 다한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 선생님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신 적이 있었다. “나 자신이 감동할 만큼 노력했는가?” 이 문장은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나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오직 나의 시선으로 정직하게 나를 바라보게 되면 지금 내가하고 있는 노력에 대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나 자신이 감동할 만큼 노력하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계속......)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1)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내가 꿈꾸는 이상주의적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즉,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열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양한 삶의 궤적들이 있다. 그 궤적들 안에는 한 개인이 세상에 태어나 각기 다양한 형태로 풀어내야할 과제들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과제들이 삶의 본질적 고민 속으로 들어가는 마중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제에 직면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열정을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흔히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이 전부인 것처럼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선 열정과 노력만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관념화된 방법들만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관점에서 흔히 사회에서 뭔가를 이룬 사람들의 경우 단순히 열정과 노력만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적 이유’를 찾기 위해선 바로 앞에서 말한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 ‘본질적 이유’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약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자라온 태아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온 그 환경이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마음도 안정되어 있다. 하지만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조차 이뤄내기 쉽지 않다. 혹여나 그 성공을 이뤄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그것’이 결여된 상태라면 그 성공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튼튼하지 못한 성공은 지속가능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서도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내 상황뿐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영향을 받은 환경들을 다시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선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삶에 있어 가장 우선시 되어야할 것 중 하나가 ‘내가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내가 내 삶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타인을 걱정하고 도움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민주제에서 공통적으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균형(balance)이라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나서 타인의 삶에 도움을 준다.’라는 생각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와 같은 부분에서 균형(balance)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가 100이라고 할 때 현재 나의 상황에 따라 내 삶에만 온전히 쓰는 에너지의 비중이 계속 변한다고 생각한다. 즉, 타인과 사회에도 나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상황에 따라 그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날 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거의 확언할 수 있는 건 자존(自尊)이 내 삶의 근본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의 삶을 존중하며, 내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나의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술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내용은 내가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삶은 수학과 같이 논리적 구조에 의해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인지 내가 삶을 대할 때마다 파편화된 다양한 삶의 주제들이 떠올라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수학문제처럼 1번문제가 끝났으니 2번문제로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1번과 2번 문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다양한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생각만으로 삶에 대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 같진 않다. 생각을 하더라도 뭔가 체계적인 과정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미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삶을 통해 고민했던 것들을 들여다보는 과정인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 철학,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을 배움으로써 삶을 좀 더 큰 시야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고전classic에 대한 관심). 지난 나의 삶에서 이런 ‘배움’의 과정이 있었기에 내게 주어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내게 남겨진 삶에서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급속히 변화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art)의 경우 다른 학문들에 비해 나의 노력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특히 미술과 음악이 그렇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의 영혼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 폭의 그림에 표현된 작가의 마음에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감수성이 앞으로 내 삶에 엄청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고, 내 마음을 끄는 작품을 만났을 때 그 작품의 작가를 찾아가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작품 감상뿐만 아니라 미술사를 바탕으로 이론 공부도 더 많이 할 예정이다. 이런 과정들이 누적되어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 나아가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데 내 나름의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엔 동서양을 아우르는 여러 음악들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보편화된 서양의 클래식은 이미 과거에 기본적인 소양을 쌓아두었지만, 지금 내게 부족한건 우리민족의 음악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 사물놀이 등등의 우리의 음악을 좀 더 많이 듣고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 공부하고 직접 답사할 것이다.

철학(philosophy)은 끊임없이 공부해야할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여러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사유를 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과정들만 숙지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그들이 사유하는 과정을 살펴봄과 동시에 내 관점으로 사유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현재 ‘자본주의’와 ‘진정한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음). 그리고 혼자서만 생각하기보다는 여러 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의 생각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국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갖는 건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누적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내 삶에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뿐만 아니라 어느 학문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결국은 배움이란 것이 삶에 녹아들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 배움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문학(humanities)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관심을 갖고 내가 친구처럼 생각하던 영역이다.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예술, 철학, 사회, 역사, 과학 등을 포괄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인문학의 경우는 인간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모든 과정에 내 열정을 바칠 것이다. 특히나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영역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예를 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지킬앤하이드를 보면서 인간의 선과악의 감정이 나도 모르는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여러 과정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끼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부지런히 할 계획이다.

사회(society)의 경우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때문에 내가 사회에서 어떤 성과를 이루었을 때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노력만으로 이룬 게 아니라 ‘사회가 내게 준 기회’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는 수평적 인간관계와 서로 상생하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면서 남는 시간과 경제적인 부분을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몇 개월 전 쌍용차문제로 농성중인 현장을 지나다 한 여름 땀을 흘리며 농성중인 해고자들을 잠시 만나게 되었다. 특히나 회계(accounting)에 대해 일반인에 비해 잘 알고 있던 나는 농성장의 플래카드에 적힌 ‘쌍용차 회계조작’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쌍용차를 회계감사했던 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나의 생각을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써내려가는 과정과 농성장에 있는 기부함에 얼마의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을 통해 뉴스에서만 접하던 쌍용차 사건에 대한 부채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지금 대한민국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쌓여있다. 이 문제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경제위기가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앞서 말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여 그로인해 우울증, 자살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급속도로 파급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부터 사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영역의 경우도 인문이라는 영역처럼 여러 학문들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통찰력을 길러 얽혀있는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깊게 고민할 시간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계속......)


2014-02-26

book 나는 학생이다 -왕멍 지음





한 개인의 에세이를 읽지 않기로 마음 먹었던 때가 있었다. 나만의 성공 스토리를 써보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다짐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책이 있었다. 제목부터 좀 이상하다 싶은 나는 학생이다라는 책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과거에 읽었던 다른 에세이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소위 시중에 나와있는 에세이들에는 과거 실수들까지도 미화하여 현재의 성공을 더욱 지원사격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하여 이 책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왕멍)가 활동했던 무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중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하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신장이라는 농촌마을에 유배되어 16년 동안 살면서도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했던 저자의 조언이라면 들어 볼 가치가 있다. 저자의 시선과 생각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아서 좋았다. 정치를 하던 사람이라 편향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구심은 서서히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항상 중앙에 있는 게 균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오노 나나미는 "균형이란 여러 상황 속에서 최적점을 찾는 일련의 과정" 이라고 말했는데, 개인적으로 공감한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오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각기 달라진다.라고 저자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상당히 공감했었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개인적으로 인생에서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도무지 최선을 다해 애를 써봐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어디로 도피를 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작은희망이라는 불씨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많은 아픔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구호처럼 외치고 있는 희망을 갖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는 말에 대해 의심의 마음을 담아 고민하기도 했었다.

책에서는 중국역사에 대한 내용이 조금은 과할 정도로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역사적 사실을 알고서 책을 읽으면 저자가 말하려는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책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한자어로 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만큼 한글 옆에 한자를 적어서 독자가 오독하지 않게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한 단어에도 다른 한자어로 여러 개의 의미들이 있어서 책을 읽는 동안 불편했다. 개인적으로 에세이를 읽으면서 유념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저자의 구체적 경험이 아니라 그 경험 속에 배울 수 있는 본질을 통해 나중에 그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상황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해결해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 것이다.

삶에 대해 문득 고민이 들 때, 나는 왜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 변화하고 싶을 때, 나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싶을 때,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사신 분들의 조언을 들어보고 싶을 때, 그리고 삶의 위기에 직면하여 고군분투하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이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진 않지만, 분명 실마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 덕분에 에세이는 이제 안 읽는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내가 처했던 위기 속에서 삶의 지혜라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고맙게 잘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작은 희망의 등불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를 느꼈으면 좋겠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마음을 여전히 난 내 가슴에 품고 있다. '작은 희망'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야 '큰 희망'도 가질 수 있다.


2014-02-25

photo book 뒷모습-미셸 투르니에 지음/에두아르 부바 사진





사람은 첫모습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누가 말했다.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 아니었기에 많은 고민을 했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부분도 어느 정도는 중요하지만, 결국엔 본질적인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진정 그 사람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한 것처럼. 

이 사진집에는 여러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과 간략한 설명이 쓰여있다. 처음 사진집을 펼쳤을 땐, 가볍게 사진들을 감상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책장을 넘길 때는 사진을 설명한 글을 함께 읽으며 사진들을 봤다. '저 사람의 앞모습은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유발되기도 했지만, 사진 속의 사람이 보고있는 풍경들에도 관심이 갔다. 같은 풍경들을 사진 속의 주인공과 독자로서의 나는 각각 다르게 보고 느낄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더욱 생각거리가 많아짐을 느꼈던 부분이었다. 

혼자 목욕탕에 갈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나 스스로 내 등을 온전히 문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안간힘을 써서 팔을 뻗거나 긴타올을 이용해서 이리저리 문지르면 어느 정도는 가능한 일이지만, 뭔가 개운한 느낌은 없다. 여기서 결국, 상대방이 필요함을 느낀다. 타인이 내 등을 온전히 바라보며 타올을 이용해 섬세히 문질러주는 순간 혼자서 해내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했다는 쾌감과 노폐물이 벗겨지며 몸에서 느껴지는 시원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렇다.
나는 나의 뒷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온전히 나의 두 눈으로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나의 뒷모습을 타인은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이 부분에 삶의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뒷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갖게되는 생각일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애썼던 적이 있었다. 사진 속에 보여지는 내 뒷모습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도 '이게 내 모습 맞나?'라고 나도 모르게 의문을 갖기도 했다. 전혀 딴 사람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타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의 앞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흥미로웠다.

물론 앞모습도 중요하지만, 뒷모습이 더욱 더 아름다운 사람이고 싶다.

뒷모습...진정한 나의 자화상...


2014-02-24

music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도입부의 강렬하게 울리는 피아노의 선율이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준 곡이다. 처음부분 뿐만아니라 연주가 계속될 수록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휴식이 필요하거나 무작정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찾을 때 꼭 순위권에 위치하는 곡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음악 취향도 바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1번이 좋아하는 곡에 포함되어 있다. 내 감정을 들었다 놨다하는 피아노의 음이 들을 때마다 다른 감정들을 일으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론 어렴풋이 어둠 속을 걷는 것 같다가도 다시금 작은 희망을 노래하는 듯한 느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됨을 느낀다.


<Tchaikovsky / S. Richter, 1962: Piano Concerto 1 in B flat Minor - Von Karajan>
http://youtu.be/y4-OSg_oU_o

================


~차이코프스키는 전3곡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으나 제1번이 대표작으로 꼽힌다.~~무엇보다도 큰 특색은 처음 듣는 순간 러시아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리흐테르와 카라얀이라는 두 거장이 맞부딪쳐 각자의 개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스케일 큰 명연주이다.~~1960년 5월, 서구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리흐테르 전성기의 초기 스테레오 녹음인 이 레코드는 그 전에 므라빈스키, 안첼 등의 지휘로 냈던 모노 음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음질로 눈부신 앙상블을 들려준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훌래트 단조 작품23
피아노: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
연주: 빈 교향악단
지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녹음: 1962년 9월



[출처: 이 한 장의 명반 클래식 -안동림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