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은 내가 삶을 보는 관점을 바뀌게 했다. 내일이
내게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오늘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해줬다. 과거에 나에게 닥친 어둠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가슴 속에는 작은 희망을 품으며 어떻게든 그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때의 경험이 내게는 너무 소중한 경험이었음을
느끼게 됐다. 나의 경험 속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휴식을 취해야 할 때 과감히 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고민 덕분에 반복적으로 만나는 가족들이 과거엔 당연한 존재들로 여겨졌지만, 언제부턴가 가족 중 어느 누군가의 부재에 대해 고민하면서 가족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매 순간에서 삶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 고등학교 적 친구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밤늦게 친구가 있는 병원에 달려갔을 때와 약60년의 삶을 사시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이모부의 시신을 장례식장의 안치실에서 직접 내 눈으로
바라봤을 때의 그 느낌들은 나에게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에 대한 소중함과 간절함을 느끼게 해줬다. 그 일련의 경험이
죽음(death)이라는 것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었고, 현재도 그 고민은 지속되고 있다. 나의 하루가 소중하다는 것을
느껴서일까? 나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저녁에 하루를 마감하며 일기를 쓸
때는 그래도 내가 오늘 하루 보람차게 살았음을 기록하며 마음이 충만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쓴 일기장이 라면박스 한 개 정도에 가득
들어갈 정도이며, 내 인생에서 큰 장애물이 있었던 지난 4-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장에 그날의 경험과 생각을 적으며 나 자신에 직면했던
기록이 여전히 일기장에 남아있다. 나는 원래 글짓기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긴 시간동안 일기를 써오면서 조금씩 글 쓰는 능력이 향상되고
있는 것을 느꼈고, 내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에도 매력을 느꼈다. 현재는 블로그나 SNS를 통해 내 생각이나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 등을
글로 표현하면서 지인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글 쓰는 연습을 더해서 앞으로 내 피와 땀으로 써낸 책을 출판하고 싶은 게 소망이다.
나의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싶은 충동을 일기를 쓸 때 마다 나도 모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 국토대장정에 참여했다.
국토대장정은 대구유니버시아드경기장에서 고성통일전망대까지 약600km를 20박21일 동안 약140명의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144명의 사람들이 12명씩(남자6명/여자6명) 한 조를 이루어 같이 걸었다. 여러 사람과 모험을 하는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나의 남는 에너지를
주위사람들에게 전달해주면서 같이 힘을 내어 걷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들 중에서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형들의 시선에서는 나대는 녀석으로 눈 밖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6명의 남자 중 내가 가장 건강한 상태로 잘 걸었다. 처음엔 혼자서 건강히 잘
걷는 내 모습에 흡족해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낙오하는 조원들을 보면서 ‘내가 건강한 건 나머지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쓰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을 하며 조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던 실수가 여전히 지금도 생각난다. 그 당시 내가
막내였고, 어떻게 손쓸 방법들이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내가 속한 조를 위해 더 최선을 다했어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나보다 체격도 건장한 형이 계속 낙오를 하면서 본대에서 쳐지는 것이었다. 그 형은 눈물을 흘리면서 본대를
따라 오기위해 애썼다. 나를 포함한 우리 조는 본인들도 걷기 힘든 상황에서 그 형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걷는 데만 열중했다. 급기야 그
형은 대장정이 중반에 들어설 때 조원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장정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난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남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그 형을 다독이며 “니가 그만두면 우리 조원들도 모두 그만 둔다”라고 말하며 끝까지 완주하길 응원했다. 결국 포기를 하려던 그
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대장정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가 그때 본대와 떨어져서라도 그
형과 같이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그 형이 내게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대장정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서 본부에서 담화형식으로 ‘힘들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걷느라 발바닥이 물집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 형은 옆에 있는 나에게 “나 좀 업어서 2층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어?”라고 부탁을 했다. 난 형의
말을 듣고 형을 업고 2층까지 업어다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기억이 즐겁지만 않은 것이 형을 도와주면서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나의 실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형은 정말 힘들어서 내게 도움을 청한 건데, 나는 그런 형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무런 감정적
교감도 없이 단순히 형을 업어서 2층까지 데려다 준 것 밖에 없는 것이었다. 진정 아픔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를 그 때의 경험을
통해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직접 아픔의 시간을 겪으면서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마음에 대해 더욱 고민하기도 했다. 대장정을
하면서 사람은 안정되어있을 때 그 사람의 본질이 보이는 게 아니라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사람의 본모습이 나온다는 것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위기 속에서 어느 한 사람이 조금만 힘을 내어 조원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모든 조원들이 더 힘차게 한발 한발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각기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20박21일이라는 짧거나 길수도 있는 시간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혼자서 600km를 걷는 건 매우 힘들지만,
같이 손잡고 걷는 것은 덜 힘들다는 것도 배웠다. 이렇게 대장정에서 배운 지혜를 통해 여러 사람과 함께 할 때 타인을 배려하는 것과 동시에
공동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역할을 조금은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결국 삶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고 타자가 있기 때문에 나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삶 속에서 나의 자존을 지켜내면서도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더욱 발전되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여러 경험과 재능 덕분에
여러 사람을 이해하는 포용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비판 받을만한 상황일 수 있겠지만, 나의 경우 비판에 앞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다보니 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기 보다는 이해하는 마음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는 중간 역할을
잘 하는 것 같다. 또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도시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보니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연결자(connector)의 역할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험의 폭을 세계무대로 넓혀 동서양의 서로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역할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외국어, 특히 영어 실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영어능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열심히 배워둔 기본 수준의 일본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영어와 일본어를 포괄하여 함께 공부할 예정이다.
즉, 외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욱 외국어 공부를 더욱 열심히해야할 당위성을 깨달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내 앞에 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가 올 미래를 준비해야할 당위성은 이미 내게 주어진 것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을 타고 나의 자유를 지켜내는 것을 바탕으로 세상에
긍정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는 그런 인재로서 내 삶을 살고 싶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길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
나가고 공정한 무대에서 서로가 선의의 경쟁을 하고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조금이나마 내가 도움이 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