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3)

내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도 여전히 필요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에 그 불행(unhappiness)이라는 위기 속에서 어떤 판단을 하여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fate)이라는 것이 정해지는 것 같다. 불교에선 그런 불행에 대해 업보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그보다 뭔가 본질적인 삶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나의 삶에도 이런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행은 이미 내게 닥친 것이며 가급적 빨리 그 불행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나아지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나의 삶에서 ‘떳떳함’이 중요하게 필요하다는 자각을 했다. 내가 살아온 삶에 떳떳하며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해왔다면, 내게 닥친 불행은 내가 더 강해지기 위한 좋은 기회라는 관점이 생기게 되었다. 즉, 그것은 내게 불행이 아닌 것이고 내가 기꺼이 팔을 걷어 부치고 맞서야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생각의 과정을 통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생각에만 그친 게 아니라 이미 삶에서도 여러 번 경험한 기억이있어서 더 이상 관념화하기 보다는 실제 삶 속에 체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이 있어야 그런 삶의 태도가 지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하기에 ‘내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바른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하자’라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바른 삶’에 대해 나름 간략히 정의를 내려 보면, 나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타자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는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닌 것 같다. 상처를 받은 타인은 또 다른 타인에게 그 상처를 주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내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대해 나름 심각하게 고민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인간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몸소 경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느꼈다. 단순히 타인의 행동에 먼저 비판부터 하는 게 아니라 그런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다양하여 내가 살아온 삶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았다가는 오판하기 쉽고 타인을 공감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삶 또한 존중하며 넓게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을 기를 것이다. 이렇게 내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함께 나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도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부모님에게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지내왔는지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런 상황은 불행하게도 내 인생에 상당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낙담하고 실패의 길로 들어서는 건 인생을 대하는 참된 자세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나의 노력으로 지금 내가 직면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 내 뒤에 태어날 미래의 후손들에게 행복한 삶을 선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삶의 어둠을 뚫고 서서히 따뜻한 태양 빛을 맞이하는 느낌을 받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진일보하는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money)에 대해 건강한 가치관을 형성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나의 자존을 지켜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고, 내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과연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단순이 ‘많을수록 좋다’는 이미 나의 영혼이 자본주의시스템에서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해버린 안타까운 경우일 것이기에 자본주의시스템에서 주체성을 지켜내며 살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할 계획이다. 그리고 ‘돈을 쓸 때는 부자의 마음이 아니라, 가난한 빈자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써야 탈이 없다’라는 말에서 상당한 공감을 받았다. 돈이 많음을 과시하는 부자의 마음이 아니라, 빈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을 통해 인본이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인 독립은 나의 자유를 지켜내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대한 부모님과 타인의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나의 힘으로 경제적 독립을 함으로써 내 삶의 주인이 되도록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돈(money)보다 시간(TIME)이 더 중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그 중 ‘항상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와 ‘타인과의 차이가 아닌 다름difference을 추구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지만, 지금 그리고 미래의 변화 속도는 지금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만을 찾으려는 태도보다는 ‘불안정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항상 배우는 자세를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 중 ‘다름difference’이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에 앞으로는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더욱 빨라질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만 해낼 수 있는 영역’을 많이 확보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과는 다른 관점을 지니고, 타인과는 다른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전반적인 나의 노력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쓴 논술의 내용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의(justice)에 대한 고민을 통해 사회에서 긍정적 가치를 실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보는 지금의 사회는 너무 빠르게만 진행되다보니, 상당히 중요한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삶이 너무 빠른 나머지, 자신이 하는 생각과 행동들의 옮고 그름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거의 없게 되고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하는 관습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환경에 살면서도 정의에 대한 고민을 계속해오다 어느 순간 그 고민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해야겠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어느 날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내가 생각하는 정의와 관련해서 어렵게 조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진정한 친구라면 친구에게 듣기 싫은 조언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내 조언에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에 입각한 어떠한 근거도 대지 않고, 조언하는 나를 ‘이상주의자’라며 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았다. 친구뿐만 아니라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행동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안 뒤에 나는 더 큰 충격에 빠지게 됐다. 더욱이 친구를 포함하여 그들은 사회에서 뭔가를 성취한 사람들이었기에 그 충격의 강도가 상당히 심하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회적 기준에서 내가 이뤄낸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의 근본을 이루는 삶의 태도라는 생각을 했다. 근본이 흐트러져 있게 되면 사회적 기준에서 이뤄 낸 그 모든 것들은 사상누각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흔들릴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실제로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