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7

fiction_ 어떻게 살 것인가?(1)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내가 꿈꾸는 이상주의적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즉,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열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양한 삶의 궤적들이 있다. 그 궤적들 안에는 한 개인이 세상에 태어나 각기 다양한 형태로 풀어내야할 과제들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과제들이 삶의 본질적 고민 속으로 들어가는 마중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제에 직면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열정을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흔히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이 전부인 것처럼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선 열정과 노력만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관념화된 방법들만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관점에서 흔히 사회에서 뭔가를 이룬 사람들의 경우 단순히 열정과 노력만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본질적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적 이유’를 찾기 위해선 바로 앞에서 말한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그 ‘본질적 이유’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약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자라온 태아가 세상에 태어나 자라온 그 환경이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대표적으로 마음도 안정되어 있다. 하지만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사회적 기준에서의 성공조차 이뤄내기 쉽지 않다. 혹여나 그 성공을 이뤄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그것’이 결여된 상태라면 그 성공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튼튼하지 못한 성공은 지속가능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갖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서도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의 내 상황뿐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영향을 받은 환경들을 다시 복기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선 목표를 설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여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삶에 있어 가장 우선시 되어야할 것 중 하나가 ‘내가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내가 내 삶조차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서 타인을 걱정하고 도움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민주제에서 공통적으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균형(balance)이라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나서 타인의 삶에 도움을 준다.’라는 생각에는 뭔가 부족함이 있는 것 같다. 바로 이와 같은 부분에서 균형(balance)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가 100이라고 할 때 현재 나의 상황에 따라 내 삶에만 온전히 쓰는 에너지의 비중이 계속 변한다고 생각한다. 즉, 타인과 사회에도 나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상황에 따라 그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가 숨을 거두는 그날 까지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거의 확언할 수 있는 건 자존(自尊)이 내 삶의 근본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의 삶을 존중하며, 내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에서부터 나의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서술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내용은 내가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삶은 수학과 같이 논리적 구조에 의해 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인지 내가 삶을 대할 때마다 파편화된 다양한 삶의 주제들이 떠올라 생각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수학문제처럼 1번문제가 끝났으니 2번문제로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1번과 2번 문제가 서로 영향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에 다양한 문제들을 고민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생각만으로 삶에 대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 같진 않다. 생각을 하더라도 뭔가 체계적인 과정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미 우리보다 먼저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 삶을 통해 고민했던 것들을 들여다보는 과정인 것 같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든지 예술, 철학, 인문, 사회, 역사, 과학 등을 배움으로써 삶을 좀 더 큰 시야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고전classic에 대한 관심). 지난 나의 삶에서 이런 ‘배움’의 과정이 있었기에 내게 주어진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내게 남겨진 삶에서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급속히 변화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art)의 경우 다른 학문들에 비해 나의 노력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특히 미술과 음악이 그렇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의 영혼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작품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 폭의 그림에 표현된 작가의 마음에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감수성이 앞으로 내 삶에 엄청난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고, 내 마음을 끄는 작품을 만났을 때 그 작품의 작가를 찾아가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작품 감상뿐만 아니라 미술사를 바탕으로 이론 공부도 더 많이 할 예정이다. 이런 과정들이 누적되어 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고 더 나아가 사회에 긍정적인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데 내 나름의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음악의 경우엔 동서양을 아우르는 여러 음악들에 대해 공부할 계획이다.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보편화된 서양의 클래식은 이미 과거에 기본적인 소양을 쌓아두었지만, 지금 내게 부족한건 우리민족의 음악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 사물놀이 등등의 우리의 음악을 좀 더 많이 듣고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졌는지 공부하고 직접 답사할 것이다.

철학(philosophy)은 끊임없이 공부해야할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여러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사유를 했는지에 대한 단편적인 과정들만 숙지하고 있다. 앞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바탕으로 철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그들이 사유하는 과정을 살펴봄과 동시에 내 관점으로 사유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현재 ‘자본주의’와 ‘진정한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음). 그리고 혼자서만 생각하기보다는 여러 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의 생각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국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갖는 건 삶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누적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내 삶에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뿐만 아니라 어느 학문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결국은 배움이란 것이 삶에 녹아들게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 배움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문학(humanities)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관심을 갖고 내가 친구처럼 생각하던 영역이다. 어쩌면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예술, 철학, 사회, 역사, 과학 등을 포괄하는 단어일 수도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인문학의 경우는 인간을 이해하는 전반적인 모든 과정에 내 열정을 바칠 것이다. 특히나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영역은 너무나도 복잡하다. 예를 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지킬앤하이드를 보면서 인간의 선과악의 감정이 나도 모르는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여러 과정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끼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을 부지런히 할 계획이다.

사회(society)의 경우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때문에 내가 사회에서 어떤 성과를 이루었을 때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노력만으로 이룬 게 아니라 ‘사회가 내게 준 기회’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는 수평적 인간관계와 서로 상생하는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필수적인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체성을 확보하면서 남는 시간과 경제적인 부분을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몇 개월 전 쌍용차문제로 농성중인 현장을 지나다 한 여름 땀을 흘리며 농성중인 해고자들을 잠시 만나게 되었다. 특히나 회계(accounting)에 대해 일반인에 비해 잘 알고 있던 나는 농성장의 플래카드에 적힌 ‘쌍용차 회계조작’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쌍용차를 회계감사했던 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나의 생각을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써내려가는 과정과 농성장에 있는 기부함에 얼마의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을 통해 뉴스에서만 접하던 쌍용차 사건에 대한 부채감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에 지금 대한민국에는 너무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이 쌓여있다. 이 문제들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경제위기가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앞서 말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여 그로인해 우울증, 자살 등의 사회적 문제들이 급속도로 파급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나부터 사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라는 영역의 경우도 인문이라는 영역처럼 여러 학문들이 서로 얽혀있기 때문에 통찰력을 길러 얽혀있는 현재의 문제들에 대해 깊게 고민할 시간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