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1-29

book 김예슬 선언-김예슬 지음







유난히도 길었던 2010년 3월 초겨울.
K대에 재학 중이던 여학생이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이고 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자퇴선언’을 했다.

처음 신문기사를 통해 이 사실을 접하고 ‘아니 왜? 3학년이면 일단 졸업하고 다른 방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알릴 수도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궁금했다. 대학을 자퇴하면서까지 그녀가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런 고민의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저자가 약간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을 바로 출간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책에는 김예슬씨가 3장의 대자보에서 말하지 못했던 내용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저자는 책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하지만, 아직 대안은 없다.”라며 약간은 자신감 없는 말을 했지만 ‘확실히 잘못된 것은 안다’라는 구절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대안이라는 것을 저자 혼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주위의 또래친구들과 머리를 맞대야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텐데, 저자가 치열한 경쟁이 아닌 협동을 할만한 친구들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지금의 20대 청년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책 분량이 상당히 적지만, 그 함축됨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많이 찾았으면 좋겠다. 김예슬씨처럼 자퇴를 하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서 지금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길을 찾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사회적 구조를 버리고 이제는 서로가 손을 맞잡고 힘을 모아야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결국엔 큰 혁명이 탄생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책을 읽을 시간이 되신다면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2014-01-21

OECD국가 자살률...해외여행 시 고려하면 좋을 점




잠시 메모지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간밤에 적어내려가다가 '왜 대한민국이 oecd국가 자살률에서 명예롭게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여러 매스컴에서 한국의 자살률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바쁘게만 돌아가는 생활에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것에 대해 깊이 고민할 여건이 충분하진 않은 것 같다. 물론, 본인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잠시 생각해봤다. 

인구밀도?
자살이라 함은 결국 한 인간의 멘탈이 붕괴되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삶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여 쉽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 생각했을 때, 한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조적인 부분에서의 문제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구조를 모르는 개인은 하나의 섬처럼 둥둥 떠다니며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 인구밀도 통계자료를 잠시 살펴보니 수도권, 특히 각 나라의 수도를 보았을 때, 한국과 프랑스를 놓고 보면 프랑스가 더 높았다. 헌데, 프랑스는 OECD국가중 한국과 어느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구밀도와 자살률과의 상관관계가 그리 크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나라의 삶의 방식...즉, 문화적 배경이 큰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사람들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며, 그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중요한 원인이지 않을까? 소개된 OECD자살률 관련 자료를 보면 그리스Greece가 맨 하위에 위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자료를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대한민국 사람이 해외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OECD자살률 하위 그룹의 나라로 가는 게 어떨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어느 정도 경제가 성장된 독일Germany, 이탈리아Italy, 영국United Kingdom 등으로 가보는 건 어떨지...이미 영예의 1위인 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그와 반대된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삶의 양식을 보고 배우는 것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대한민국은 '압축성장'으로 단시간에 경제적인 부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이라면 중요시 여겨야할 감정과 마음이란 영역을 소홀히 한 것 같다. 너무 이성적인 생각에만 치우쳐 부지런한 게 마냥 좋다는 사회적 관념을 그대로 수용한 나머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만하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라는 사회적 배경이 형성된 것 같았다. 정작 인간이 관심가져야할 부분은 자신의 마음일 텐데. 그 인간의 마음을 너무 등한시 한 것 같다. 이젠 이성과 감성에서의 균형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하다.

내가 살고 있는 울타리를 걷어내고, 새로운 삶도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가계부채 1000조 시대...부동산 버블...

최근들어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빚을 내어 집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접하게된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소식이라면 심각성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이젠 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젠 내 주변의 지인들에게서도 빚 내서 집을 구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  'kbs파노라마'라는 다큐에서 '가계부채 1000조, 빚 권하는 사회(2013년10월11일 방영)'라는 주제로 가계부채 문제와 부동산에 대한 내용을 다룬 걸 봤다. 그 심각성이 확연히 뇌리를 강타함을 느꼈다.

집을 구매하는 것에는 비판을 하고 싶진 않다. 각기 자신들의 상황에서 판단한 것일 테니까. 하지만, 무리하게 빚을 내어  집을 구매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심각히 고민을 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현재 대한민국 경제는 심각히 불안정한 상태이고, 그 불안정의 폭탄의 기폭제가 부동산에서 시작될 확률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속되는 저금리 시대가 어느 순간 금리를 올려야하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부채는 악마에게 나의 영혼을 파는 것이다'라고 언제나 누군가 말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부채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가급적 부채를 줄이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부채를 갚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갚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정신적 고통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상당히 큰 부정적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채를 짊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상할 만큼 이상해진 것이다. 옛날에는 번 만큼만 소비했다. 하지만 신용카드와 여러 대출제도들에 의해 지급이 유예되면서 사람들의 소비심리에 시동을 걸어 죽음의 레이스를 시작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부채Liability'에 대해 심각히 숙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눈의 소중함 Important of EYEs



라식이나 라섹을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신중하게 고민하셨으면 한다.




군중 속의 고독 Loneliness in crowd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많을지 모른다.
그 숫자가 한 순간 행복감을 안겨주긴 하겠지.
"내 친구 누구는 뭐하는 사람이고..."라고 자랑도 하겠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내 주위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
왜 이리도 고독감이 느껴질까?

그건...
그건 어쩌면...
지극히 내 생각인데...
너의 겉모습만, 너의 화려하고 즐거운 모습들만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려하지, 너의 아픔까지 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라. 왜냐구? 두렵거든. 상대의 아픔까지 진정 사귀기가 두려운거야. 그래서 외롭고 고독감이 느껴지고 그러는 거 아닐까?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일텐데...

난 말이지...
많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는 것 보단 내 마음을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었으면 좋겠어. 마치 내가 사형장에 끌려 갈 때 내 가족을 맡길 수 있는 단 한 명이 내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처럼...

근데 희한한 건...
인간은 꼭 그 상황이 되어서야 깨닫는다는거야.

니가 내일 죽을 수도 있다고 상상해봐.
내일, 아니. 바로 지금부터 넌 달라질거야.
아무리 이런 말을해도 이해하지 못하니 내가 침묵하는 수 밖에...

<출처: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 중에서...>



자기애自己愛; Self-love

어느 누군가 말했다. 개인적으로 공감(sympathy)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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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 철저하게 나를 사랑해야해요.
나를 사랑해야
비로소 나를 낳아준 부모님이 고맙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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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시간을 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타인과의 만남이 배제된 오직 나 자신과의 만남을 갖는 시간.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내 마음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며, 이런 생각의 흐름이 더욱 증폭되어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데, 도움을 준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여러 정보통신매체를 이용하여 (각 개인들이)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격리된 듯한 심각한 고독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이해된다. 결국 이 문제는 혼자있을 때 내가 나를 어떤 관점으로 보는가부터 시작돼야하는 게 아닐까? 진정 나와 대면하는 시간을 회피하면서 타인과 제대로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걸까?

이런 맥락 속에서 "자기애"라는 것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내가 혼자서 나와 대면할 때 나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을 같게 되면, 그 후 타인을 만났을 때 긍정적인 관점은 증폭되어 내 삶을 풍요로 이끌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나 자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런지...




단순히 '희망'을 노래하는 건 맹목적인 우상화인 것 같다. 우선은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긍정적으로 하는 게 필요하다.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긍정으로 대하게 되면 내 부모, 내 친구, 내 아내... 나와 손을 잡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내게 될 것 같다.

나 자신의 자존감(Self Esteem)이 최우선이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다.

바코드의 역설 Paradox of Bar code




컴퓨터가 발명되면서 인류의 삶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굳이 인간의 노동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기계장치에 명령만 입력하게 되면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도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함에도 오점은 있기 마련이다. '바코드만 바꾸면 마트에서 내 마음대로 가격을 조정하여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선한 생각은 아니지만, 만약 타인(마트 관계자)이 이 사실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물건을 판다면?  '바코드가 맞겠지'하고 생각한 일반인은 문명의 이기에 본인의 가치판단이 개입될 부분을 빼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코드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긴 했지만, 큰 맹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확인하는데, 진열대에 표시된 가격과 실제 영수증에 찍힌 가격에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점원에게 이야기하니 자신들의 착오를 인정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그 후에도 2-3번 더 있었다. 물론, 같은 매장이 아니라 다른 매장에서. 이 또한 본인이 여유가 있었던 기간이었기에 발견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방식처럼 바빴더라면 쉽게 발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의 노동에는 분명 헛점이 있다. 물론 그 헛점을 찾아내는데는 시간적, 경제적 여유 또는 본인의 판단이 고려되야겠지만... 첨언하면, 여기엔 '돈의 추상성'도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금이 아니라 단순히 '숫자로 표시되는 돈'이다보니 사람들이 돈에 대한 감각을 잊어가는 듯하다. 100만원과 1000만원은 숫자로 볼땐 "0"하나가 있고, 없고의 차이이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을 형상화 시켜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런지...




충분히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진정한 성실...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29번의 뜀뛰기..총누적거리 126km..

온전히 내 몸으로 뛰었던 거리다.

'오늘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언젠가 목표지점에 다다른다. 하지만...오늘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으면 목표지점엔 영원히 갈 수 없다.'

여기서 '꾸준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목표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왜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모르면 꾸준함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목표'가 내 삶에 가치있는 것인지, '목표'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심사숙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어쩌면 둔하면서 성실한 나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성실함에는 큰 힘이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한다. 일기장을 사서 매일 조금씩이라도 무언가를 적다보면 언젠가 마지막장을 덮게 되는 걸 직접 경험하면서 '작은 힘'이 누적되면 큰 힘이 되는 이치를 더욱 깨닫게 된다. 꾸준히 조깅을 29번 하다보니 어느새 126km를 온전히 내 다리로 뛰게 되는 것처럼...

큰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작은 것들에 충실하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큰 희망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을까?

2014-01-17

친구....우리의 중대한 착각 Friends...Our Major Mistake




과거 '친구'에 대해 고민하다 어디선가 보거나 들었던 내용을 옮겨 적어본다. (개인적으로) 전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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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늘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의 성취가 나의 성취만큼 기쁘다면, 분명 나는 그에게 '친구'입니다. 반면 그의 아픔과 좌절을 나누는 것은 굳이 친구가 아니어도 누구나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대한 착각은... 그의 아픔만 같이 한다고 친구라고 여기는 것이죠... 친구는 그의 기쁨을 뛸듯이 같이 기뻐하는 존재라는 사실...이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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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소문'으로 접하는 타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면 대분분 '타인의 불행'이 이야기의 주된 주제일 것이다. 결국 인간은 아쉽게도 남의 행복에 질투를 하는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남이 잘되는 걸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게 어렵다는 의미다. (이런 나의 생각이 바탕이 되어 위의 인용글에 공감하게 됐다).




쌍용차 그리고 회계




내가 아는 사실fact는 이렇다.

"50억의 손상차손이 5000억원으로 증가했다"

내 생각엔, 회계조작 여부가 본질적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쌍용차를 감사하신 어느 회계사분께서 50억이던 손상차손을 5000억원으로 증가시키실 때, 그 이후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고도 손상차손을 인식해야할 정도로 쌍용차의 재정상황이 심각했냐는 것이다(아무리 쌍용차를 살리려고 노력해봤지만 쌍용차의 재정이 너무나 부실했기에 어쩔수 없이 손상차손을 인식하셨냐는 의미).

손상차손을 인식할 때는 '추정guess'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에 법률Law 안에서의 추정은 법을 위반한 게 아닌 것이 된다(결국 인간이 가치 판단을 해야하는 영역). 그런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것을 놓고 볼때, 쌍용차를 긍정적으로 보려 노력할 것이냐, 아니면 가급적 부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2000-3000여명이 해직됐고, 그중 20명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쌍용차를 감사하신 어느 회계사들에게 법률적 책임은 없을진 모르지만, 그들에게 윤리적 측면, 정의의 측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나의 판단과 행동으로 수천명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부모님을 사랑하세요? Do you love your Parents?


부모님을 사랑하세요?

부모님이 좋아하는 노래는?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은?
부모님이 좋아하는 색깔은?

다시 묻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세요?

(문득 강연을 듣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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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부모님을 진정 사랑하는지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모든 것이 독립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알 수 있다고 언젠가 누군가 말했다. 그러니 지금 부모님과 함께 살거나,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경우 쉽게 "난 부모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하지 말라했다.

부모로부터 모든 것이 떨어져 독립되었을 때도 시간이 날때마다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쉬는 날이면 먼길도 마다않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그때가서 진정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당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공자의 제자가 공자에게 "효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런 대답을 했다."부모는 자식이 아프지 않을까 항시 걱정이다"라고.... 이 말에 너무나 깊은 뜻이 있음을 알고 무릎을 쳤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


마트의 무인계산대
셀프 주유소
극장의 무인발권기
지하철 무인발권기
주차장 무인관리기
도서관 무인대출반납기
......

현재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졌을까?
아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앞으로 없어질 것인가?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공포감을 느낀다. 이는 부의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 됨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트나 주유소, 극장 등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게 대부분이며 대기업에 소속되어 일하시는 노동자의 수가 줄게되면 그 이득은 기업에게 그대로 귀속된다.

결국 기계, 대표적으로 컴퓨터가 해내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몇십년이 흐른뒤,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나올때라야 변화를 체감할 것 같다.

탐욕 그리고 행복 Greed and Happiness



나쁜 습관을 버리듯
탐욕을 버리는 것...

모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시간은 한정돼 있는데?

결국 내가 바라는 행복감을 선택하는 것
삶의 본질과 가까운 행복을 가까이하며
삶의 본질과 먼 행복방정식은 멀리하는...

시간은 한정돼있기에...

미디어와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든 행복방정식에 등을 돌리고
삶의 본질적 행복에 다가가는 삶...

나는 얼마의 돈money이 필요한가?


예전 누군가 "욕심을 버리는 게 힘드니 차라리 노력을 더 하세요"라고 말했을때, 그땐 동의를 했었다. 하지만 시간 흐를수록, 내 범위에서 이런저런 직간접적 경험과 고민을 해보니, 그 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심(탐욕greed)은 끝이 없구나. 힘들겠지만 지나친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겠다'

어쩌면 우리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욕심"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돈...money...
당연히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욕망은 필요할지 모른다. 대표적으로 경제활동과 동기부여라는 측면에서. 하지만, 각 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정선"이 어딘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에겐 얼마의 돈이 필요한가요?"에 대한 대답으로 가장 염려되는 대답은 "많을 수록 좋아요"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본주의가 만든 시스템 속에서 자본에 얽매이다보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다. 언젠가 지인과 이야기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큰 문제점이 뭐라 생각하나요?"라고 물으니 "신뢰의 부족"이라고 답하셨다. 인간이 인간을 믿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종교를 맹신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신뢰의 부족...그 신뢰의 부족을 자본이 대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얼마의 돈이 필요하신가요?"
"신뢰하는 사람이 주위에 몇명이나 되나요?"

나는 진정한 자유인인가?


자유

개인적인 생각에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하지만 인간이라면 얻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냉정히 말하자면, 고통을 뛰어 넘어야만 자유가 주어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들 그리고 여러 상황이 엮여 여러 스토리Story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즐거운 일은 그 자체로 어느 인간에게나 즐거움을 주지만, 삶에서 겪게되는 긍정적이지 못한 일들은 인간 개개인에게 각기 다른 양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고난, 고통... 어떤 이는 운명 혹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고난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닐까?

(어느 누군가의 경험일 수도, 어느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 일 수도 있는데)
그 장애물을, 그 고통을 힘들겠지만 정면 돌파하라고 (어느 누군가는)말했다. 초기엔 상당한 심리적 압박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고난을 딛고 일어서 높게 날아오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도 덪붙이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공감을 했다.

흔히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상처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려고 상처를 응시하려는 사람과 그 상처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으로 크게 나뉘는 것 같다. 외면한 채 살아가는 것...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른 뒤) 찱흙이 서서히 굳어버렸을 땐, 찰흙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기엔 좀 늦었다는 걸 본인이 직감적으로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상황.

개인적으로 나는, '진정한 자유' 를 얻고 싶다.
내게 펼쳐진 삶의 문제들을 껴안은채 더 높게 날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제를 껴안은 채"라는 것. 역설 같지만, 인간의 삶에서 적절한 고난이 있어야 행복감을 더 느낄 수 있는 이유에선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어둠을 알아야 밝음을 더 인지 할 수 있는 것 처럼.

나는 진정한 자유인인가?

결국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멘토를 만나면, 멘토를 죽여라.

언젠가 신문에서 본 글귀가 생각난다.  
(개인적 관점에서) 풀어써 보면 "결국 너 자신의 문제는 네가 해결해야 한다. 
너가 멘토라 부르는 그 사람은 너에게 아주 조금의 (문제해결의)실마리를 던져줄 뿐이다."
라고.

언젠가 라디오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서점가나 여러 강연에서 힐링이다 위로다 하면서 사람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엔 교묘하게 자본주의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것 같아요"

위로, 힐링...

물론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적정선"이 문제인 것이다. 
위기에서 일어서려는 사람에게 힐링과 위로로 
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 되는 건 좋은 것이지만, 
아예 드러누운 사람에게 힐링과 위로는 그다지 좋은 것만 같지는 않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사람에겐 쓴소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결국 문제는 본인이 풀어내야 하는 것.
문제해결의 본질적 실마리를 본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즘 여러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몇몇 강연자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좀 걱정이 되었다. 

'과연 저 사람이 앞으로 몇년 갈까? 

지금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
여러 책이나 강연들은 하나의  실마리를 잡기 위한 작은 희망일 뿐이다.

자신의 문제해결의 본질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