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2

movie_ The Adjustment Bureau 조정국(컨트롤러)





나의 행동이 과연 나의 주체성으로 행해진 것인가?
나의 습관은 내가 선택하여 형성되어진 것인가?
프레임(Frame)에 갇혀 살면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영화를 본 뒤 불편하게, 반복적으로 스치던 생각들이었다. 습관이라는 것도 어쩌면 아주 어릴적 환경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쌓여 시간이 흐른 뒤에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전적으로 부모의 돌봄을 받아야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부모에게 받은 긍정적, 부정적인 영향이 그 아이의 일생을 규정지을 수도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어떤 직면의 태도를 가져야할지 심사숙고해야하지 않을까? 말랑말랑한 찰흙은 조금만 노력하면 원하는 모양으로 재창조된다. 하지만 그 말랑한 찰흙은 시간이 흐를수록 굳어져 다른 새로운 무언가로 재탄생하기가 참으로 힘들게 된다. 이런 이치가 인간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아닐지......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혁신하기 위한 정말로 힘든 그 과정을 어떤 열정으로 뛰어넘을 수 있을까? ... 사랑 ...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그 용기가 틀(Frame)에 갇혀 있는 삶에 새로운 희망을 선물해 준다는 것. 이 영화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에게 해준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이라고 사회자가 묻자 어느 소설가는 "내 전부를 다 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내 전부를 다 준다는 건 내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선물한다는 것인데, 실행에 옮기기 상당히 힘든 만큼 그 소설가의 대답에는 삶의 본질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진정한 사랑'의 영역에까지 깊게 들어와 있음을 느꼈다.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인지, 부모나 사회가 만든 틀(Frame)에 의해서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게 아니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노력하면 되기 때문에... 하지만 어디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졌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면 출발을 도대체 어디서해야할지는 오리무중이 아닐런지......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인간이 어디로 가야할지 불안해 하던 옛날, 신의 힘에 의해 인간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의미가 아닐런지... 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극중 멧데이먼은 자신의 기억이 모두 지워질 위험을 감당하며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진한 키스를 한다. 그 순간 멧데이먼을 억압했던 구조는 깨지게 되고 '자유'를 얻는다. 나를 억압하는 것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응시하고 직면하여 그걸 디딤돌 삼아 더 높은 자유를 향해 도약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장자>>에 나오는 대붕이라는 새가 생각난다...

괜찮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