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01

book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 받은 이유는
아마도 책 제목이 <<피로사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 제목에 의해 선택 받아졌으나
과연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조금은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인 생각에 이 책은 많은 공부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철학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0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 분량이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해가 안된 문장은 몇 번씩 다시 읽어가며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지금 '피로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과거 우리는 산업혁명이 주도하는 시대에 규율과 통제에 의한 
억압된 생활을 하며 어떤 권력을 가진 타자의 틀에 짜여진 삶을 부지런히 살아왔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규제와 억압이 상당 부분 사라진 
'자유'가 누려지는 사회라고 저자는 말한다. 

'규제-자유'라는 상반된 상황에 놓인 인간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그 '자유'로 인해 삶의 균형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후기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무한자유를 바탕으로한 
'성과사회'는 한 개인에게 '무한한 성과'를 요구하면서 
개인은 이제 권력을 가진 타자에 의해 착취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본인을 착취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과거에는 '해야 한다'가 주요한 구호였다면 
현재는 '하면된다'라는 무한 긍정 속에서 
한 개인은 타자와의 경쟁보다 더 강력해진.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끝도 보이지 않는 질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결국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무엇을 버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한한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어느 곳에 가치있게 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일과 휴식의 균형,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균형...

언젠가 실리콘밸리의 어느 기업에서
업무량이 많고, 힘들긴 하지만, 직원들의 가족들을 배려하는
기업문화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조가 긍정적인 측면으로 변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반면 한 개인이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나 자신과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는 노력들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런지...


[첨부: 책 내용 중 괜찮았던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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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그러나 후기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죽음의 기술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할 종교도 이제 그 시효가 다 되었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적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사색적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적으로 된다. 실상 활동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적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 못하는 과잉활동적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적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서 불안이나 슬픔처럼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 즉 부정적 감정도 약화된다. 사유 자체가 "항체와 자연적 면역성으로 이루어진 그물"이라면,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보다 더 빨리 계산할 수 있고 엄청난 데이터를 조금도 토해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컴퓨터에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힘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긍정적 힘으로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 힘으로서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니체의 말을 빌린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지각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적 힘 없이 오직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는 긍정적 힘만 있다면 우리의 지각은 밀려드는 모든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처지가 될 것이고, 거기서 어떤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활동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 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적 힘, 긍정성의 과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 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참선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오는 것에서 스스로를 해방함으로써 무위의 순수한 부정성, 즉 공空에 도달하려 한다. 그것은 극도로 능동적인 과정이며 수동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참선은 자기 안에서 어떤 주권적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이다. 이에 반해 긍정적 힘만을 지닌 사람은 대상에 완전히 내맡겨진 신세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활동과잉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적 힘의 일방적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 부정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심적 억압과 부인의 부정성을 전제한다.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것처럼 무의식과 심적억압은 "매우 커다란 상관성"을 지닌다. 하지만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와 같은 오늘날의 정신 질환은 심적 억압이나 부인의 과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 즉 부인이 아니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무능함, '해서는 안 됨'이 아니라 '전부 할 수 있음'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정신분석학으로 이런 병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울증은 초자아와 같은 지배기관에서 오는 억압Repression의 결과가 아니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억압된 심리적 내용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줄 프로이트적 "전이"도 일어나지 않는다.~

@@~슬픔은 강렬한 리비도가 투여된 대상의 상실과 함께 일어난다. 슬퍼하는 자는 전적으로 사랑하는 타자와 함께 있는 것이다. 후기근대의 자아는 리비도적 에너지의 대부분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한다.  그렇게 쓰고 남은 리비도는 계속 늘어나는 연락처와 일시적 관계에 배분되고 흩어진다. 매우 약한 리비도를 타자에게서 빼내어 새로운 대상에 투여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애도 작업"은 불필요하다.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서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로의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21세기의 대표 질병인 소진증후군이나 우울증 같은 심리 질환들은 모든 자학적 특징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폭력을 가하고 자기를 착취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폭력은 희생자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성과주체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로우며 그것에 의해 노동을 강요당하지도, 착취의 희생자가 되지도 않는다. 성과주체는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 지배기구의 소멸은 강제구조의 제거로 이어지지 않고, 다만 자유와 강제의 통합을 가져올 뿐이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착취한다. 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더욱 가속화된 발전을 위해 타자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착취로 전환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니체의 입장에서 그러한 인간은 주권적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예로서 스스로 착취당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다. 에랭베르의 가정과는 반대로, 니체의 주권적 인간은 실은 탈진한 성과주체에 대한 문화비판적 대항 모델로서 여유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영혼"은 "평정"을 유지하고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친 활발함에 대해 거부감"을 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적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은 생동성을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적인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 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주석 부분)
~22)니체의 최후의 인간은 신의 죽음 이후 건강을 새로운 여신으로 선포한다. "[------] 사람들은 건강을 숭배한다. '우리는 건강을 발명했다.' 최후의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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